도쿄의 밤, 회식이 문화가 되는 회사

일하는 방식 개혁이 선물한 시간

by 단미

내가 회사에 들어갔을 때는 2016년부터 아베 신조 총리가 본격적으로 추진한 '일하는 방식 개혁(働き方改革)'이 한창이던 때였다. 장시간 노동을 개선하며 워크라이프밸런스를 개선시키겠다는 취지에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정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 회사는 어떻게 보면 급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일하는 방식을 바꿔나가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블랙 기업과 화이트 기업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 블랙 기업은 장시간 노동, 저임금, 괴롭힘 등으로 직원들을 혹사시키는 회사를 뜻하고, 화이트 기업은 그 반대였는데 우리 회사는 후자 중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회사였다.


2017년부터는 업무시간을 20분 단축하고 8시 15분부터 4시 30분까지로 변경하였는데, 이 안에서 코어 타임만 지키면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다. 일찍 와서 일찍 가는 것도, 늦게 와서 늦게 가는 것도 개인의 업무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조치였다. 거기다 매주 수요일은 노 잔업데이로 정해놓고 5시에는 오피스를 소등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었다.


"○월 ○일 ○○상과 함께 마시러 가기로 했는데, 혹시 단미도 저녁에 시간 있으면 같이 어때?"

비워진 시간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모이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맥주 한 잔과 함께 회포를 푸는 소위 노미카이(飲み会, 공식적인 회식 및 캐주얼한 술자리까지 포함)의 문화가 활발해진 것이다.


노미카이 계획은 대부분 미리 세워졌다. 캐주얼한 자리는 선배들이 미리 권해서 일정을 잡거나, 공식적인 자리는 몇 개월 전부터 스케줄이 추가되었다. 또한 도쿄의 가게들은 대부분 예약 중심이기 때문에 가게도 미리 정해놓아야 했다.


아무래도 식품회사에는 기본적으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노미카이 때도 '어차피 먹는 거, 최고로 맛있는 걸 먹자'는 철학이 있었다. 그래서 노미카이 장소를 정할 때마다 일본의 대표적인 맛집 리뷰 사이트인 타베로그(食べログ)를 찾아보는 건 암묵적인 룰 같은 거였다. 5점 만점에 보통 3.5점 이상은 되어야 선배들에게 후보군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3.7점, 3.8점대 고득점 맛집들을 위주로 후보를 추려내고, 예산과 위치, 분위기까지 고려해서 "이 중에서 어디가 좋을 것 같으세요?" 하고 선배들에게 컨펌을 받는 과정이 꽤 재미있었다.


그 덕분에 5년간 정말 도쿄의 맛집을 많이도 돌아다녔다. 일본 전통 요리는 물론이고, 이탈리안, 프렌치, 중화요리, 한국요리까지. 도쿄라는 도시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세계 각국의 음식을 정말 높은 퀄리티로 맛볼 수 있다는 것! 엄청난 혜택이었다.


일본의 노미카이 문화는 한국과 조금 달라서 보통 2시간제, 3시간제 같은 시간제한이 있었고, 5000엔 코스에 주류 무제한(飲み放題)을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무작정 늦은 시간까지 마시는 것보다는 정해진 시간 안에서 효율적으로 즐기는 분위기였고, 다음 날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노미카이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 이상의 의미였다는 걸 깨닫는다. 새로운 나라에서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나에게, 동료들과 함께 보낸 그 저녁 시간들은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달콤한 휴식이기도 했다. 업무 시간에는 미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 서로의 취향과 관심사, 때로는 고민과 걱정까지도 자연스럽게 공유하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국적도, 나이도, 직급도 모두 무의미해졌다. 그저 같은 테이블에 앉아 함께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저녁이 있는 회사에서의 노미카이. 그 시간들은 지금도 내 마음 한편에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일본에서의 5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이 쌓여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참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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