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가 만드는 겸손의 거리

수수 표현이 보여준 관계의 방식

by 단미
"3時までこの資料を作成していただけますか?(3시까지 이 자료를 작성해받을 수 있을까요?)"
"○○さんに聞いてもらえますか?(○○씨에게 물어받을 수 있을까요?)"


일본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고 놀라웠던 것은 "~해주다"라는 표현으로 "〜てくれる(~해 주다)"가 아닌 "〜てもらう/〜ていただく(~해 받다)"가 정말 빈번하게 사용된다는 것이었다. 학생 때는 쓸 일이 많지 않아 익숙하지 않았는데, 회사에서는 말 그대로 하루종일 이런 표현들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겸양을 나타내는 표현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거였다.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는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본어만의 특수한 용법이다. 일본어에는 행위의 수수 표현이라는 섬세한 체계가 있어서, '누가 누구에게 어떤 행위를 해줬는가'를 매우 세밀하게 구분한다.



이 네 가지 표현은 모두 '누군가가 도와줬다'는 같은 사실을 담고 있지만, '도와준 입장'이 주체인지, '도움을 받은 입장'이 주체인지, 그리고 얼마나 공손하게 말할 것인지에 따라 문장이 달라진다. 비즈니스에서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려면 그 미묘한 뉘앙스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선배들은 나에게 일을 요청할 때, "この資料を分析してくれますか?(이 자료를 분석해줄래요?)"가 아닌 "この資料を分析してもらえますか?(이 자료를 분석해받을 수 있나요?)"라고 말했다. 즉 상대가 행위를 '해준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해주는 것을 받는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상대에 대한 겸양을 더하고 있었다.


사실 '나'를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주고/받음'의 방향성만 이야기하는 한국어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 처음에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부분을 구별할 수 있게 되면서 일본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뉘앙스를 구별할 줄 알게 된 것과는 별개로, 애초에 왜 이런 표현이 일본어에 생겨났을까가 궁금했다. 공부해보니 이건 일본 사회에서 중요시되는 가치인 '和(와)', 즉 조화와 연결되어 있었다. 개인의 표현보다는 집단 내 균형을 우선시하는 문화에서는 관계를 유지하고 충돌을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언어를 미세하게 조율하며 사용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발전해온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이 수수 표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행위의 주체와 수혜자를 명확히 구분하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나의 위치를 고려해 표현을 선택하는 언어 체계가 만들어졌다.


도와준 사람을 높이고, 받은 쪽은 몸을 낮추는 말의 체계. 상대와의 거리, 나의 위치, 그리고 분위기를 가늠해가며 말끝을 조절하는 법. 그건 단순한 문법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언어적 장치였다.


일본식 수수표현에 익숙해지고 나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상대가 나를 위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단순히 '도와줬다'고 말하는 대신 '도움을 받았다'고 표현하며 감사를 전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누군가에게 업무 협조를 받았을 때 "OOさんが協力してくれました(OO상이 협력해주었습니다)"라고 하기 보다는 "OOさんに協力していただきました(OO상에게 협력해받았습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여 존중을 표하고, 동시에 '감사하다'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협력을 받은 감사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표현을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 많은 뉘앙스를 담을 수 있는 언어. 일본어가 고맥락 소통 언어라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5년간 이런 언어를 쓰다 보니 사고방식도 바뀌었다. 뭔가를 요청할 때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내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하게 됐다. 결국 겸손이란 건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자 관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라는 걸 배운 것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지금도 나도 모르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라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일을 요청하게 된다. 동료들은 "왜 그렇게 돌려서 말하냐"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돌려 말하기 속에 숨어있는 관계의 기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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