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을 특별하게 살고 싶지만 매일이 특별할 순 없기에 나와 남자친구는 가끔 뜬금없이 그날 하루를 기념일처럼 대하고는 한다.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오늘 저녁은 라자냐를 먹고 싶어. 우리의 라자냐.”
어느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 든 상대방이 오케이 하면, 그 날 저녁 우리는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함께 하기로 약속했던 그 날의 음식, 라자냐를 먹는다.
처음 그의 집에 초대받았던 날, 그가 비건 라자냐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라자냐는 칼로리가 높은 음식이니 조심해야 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어떤 재료들이 들어가는지 본 적이 없었다.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이어터들 사이에서 금기시되는 식재료 버터를 “아낌없이” 퍼서 팬에 녹인 후 양파, 당근, 가지 등을 익히다가 토마토 페이스트를 더해 소스를 만든다. 밀가루와 두유를 섞어 만들어서 꾸덕하고 느끼한 베사멜 소스와 비건 치즈도 준비한다. 누구나 다 알 듯 “밀가루로 만든” 넓적한 라자냐 면이 물에 살짝 데쳐진 채로 오븐 용기에 한 장씩 털썩 몸을 뉘었고, 그 위로 토마토소스, 베사멜 소스와 치즈가 켜켜이 거위털 이불처럼 수북하게 쌓였다. 파스타 중 단연코 라자냐를 가장 좋아하지만,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증 때문에 한국에서 좀처럼 먹지 않았다. 그가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며 과연 저건 몇 칼로리일까 헤아려 보다 포기하고 말았다.
오븐에서 갓 나온 라자냐는 뜨겁게 끓고 있었다. 용기 바닥으로 흘러나온 새빨간 오일도 보글보글, 라자냐 위에 담뿍 올린 비건 치즈도 보글보글거렸다. 나이프로 조심스럽게 잘라서 입에 넣는 순간, 그 맛은 단연 최고였다. 부드러운 라자냐 면과 새콤한 토마토소스를 잔뜩 머금은 야채들이 달큰하게 입 속에서 뭉개졌다. 토마토소스만 넣었다면 개성이 너무 강해서 따로 놀았을지 모를 각 층의 라자냐를 베사멜 소스가 아교처럼 이어주었다. 새콤하면서 달큰하고 그러면서 고소한 맛. 거기에 서양 음식의 필수인 치즈의 느끼함까지 더해지니 완벽했다. 요알못에 초보 비건이었던 내 인생에 이렇게 느끼하고 고소하면서 풍성한 맛은 없었다. 한 입 넣을 때마다 내일 배불뚝이 돼지가 되어 뼈저리게 후회할 것만 같았지만 포크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요리는 언제나 맛있지만, 내 마음 한 켠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한국에서 30년간 무조건 멀리해야 하고 무찔러야 할 적이라고 배웠던 밀가루, 흰쌀, 설탕, 버터, 치즈를 요리에 아낌없이 넣는 그를 보며, 내가 너무 거대해져 버릴까 봐 겁이 났다. 이걸 먹고 나면 며칠 저녁을 굶어야 할지 계산을 시작하며 지끈거리는 머리와 그럼에도 그 맛과 행복을 뿌리치지 못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싸웠다. 더 먹어도 될지, 여기서 멈춰야 할지, 내 접시 위에 올려진 라자냐가 조금씩 줄어들 때마다 내 포크질은 한 없이 느려지고 머리는 복잡해져만 갔다.
“난 의지가 약한 거 같아. 이렇게 살쪄서 돼지 되는 거 싫은데 맛있는 걸 포기하는 게 너무 힘들어.”
내가 자책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굳이 라자냐를 포기할 필요 없어. 이거 먹는다고 갑자기 살이 확 찌지도 않고 너는 전혀 살찌지 않았어. 그리고 설령 네가 지금보다 훨씬 더 몸무게가 늘어난다고 해도 너는 똑같이 나에게 가장 예쁘고 매력적인 사람이야.”
실제로도, 라자냐를 먹었다고 엄청 거대해지지도, 건강이 확 나빠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몸무게에 대한 강박증으로 매일 체중계 위에 올라가고,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며 음식을 혐오하는 내 마음이 건강을 해치고 있었다. 그 마음 때문에 내 몸이 실제보다 더 거대해 보이고 미워 보이는 것을 알았다. 왜 음식을 먹으면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지, 먹는 기쁨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네가 해준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살을 못 뺀다는 농담인 척하지만 사실 진심인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령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먹다가 살이 찐다 해도 그건 내 선택이고 누군가에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맛있는 건 죄가 아니다. 맛있는 걸 먹고 싶은 내 마음, 맛있는 걸 즐기는 내 행복도 죄가 아니다.
층마다 부드러움과 풍요로움을 담고 있는 라자냐는 나이프로 한층씩 썰어 내려가는 그 순간부터 마음이 행복해진다. 라자냐야말로 식사가 미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으로 즐기는 행위임을 가장 크게 실감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닐까 한다.
이제 나 자신을 그만 괴롭히고 몸도 마음도 행복해지기 위한 선언이 필요할 때다. 그리고 그 선언은 꼭 라자냐를 먹으며 하고 싶었다.
“내 인생에 다이어트는 더 이상 없어. 건강하기 위해 운동도 하고 식단도 신경 쓰겠지만 앞으로 다이어트는 안 할 거야.”
증인 라자냐와 남자친구는 누구보다 이 선언에 기뻐해 주었다.
여전히 지금도 거울을 보며, 왜 이렇게 살이 찐 거냐고 자책할 때가 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고 설령 몸이 변한다고 해도 예쁘다는 생각은 언제쯤 100 퍼센트 진심이 될지 아직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제는 우리의 특별한 날을 만들고 싶은 날, 오늘 저녁 라자냐를 먹고 싶다는 말을 망설임 없이 한다. 그리고 그날의 라자냐를 접시에 가득 담아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