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넌 게임이 싫다고 말했어

내 남자친구는 덕후

by 청두유



데이트를 막 시작한, 지금보다 살짝 풋풋한 커플이었던 시절 그는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가시간에 주로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게임을 하는 사람을 선호하지는 않았던 터라 그의 말이 무척 반가웠다.

대학생 시절부터 틈만 나면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는 친구들을 많이 봐왔기에 마음속으로 옐로카드를 들게 하는 게임 목록도 있었다. WoW(World of Warcraft), LOL(League of Legend), 서든어택(Sudden Attack), 오버워치(Over Watch), 스타크래프트 등 PC방으로 사람을 끌어들여 놓곤 쉽사리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게임들을 즐기는 사람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시간과 마음은 돈만큼이나 중요하면서도 한정적인 자원이라서 사람마다 어디에 얼마만큼 사용하는지 그 대상과 비율이 다르다. 마음의 사용처가 겹치는 사람들끼리는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게 쉬워서 빨리 가까워진다. 같은 이유로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도 공통된 취미가 있으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 자원이 풍부해져서 관계가 더 돈독하게 유지될 확률이 높다. 시간과 마음을 모두 동일한 곳에 쓸 수는 없으니 서로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가끔 불균형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기도 하는데, 한쪽이 전혀 다른 분야에 과하게 푹 빠져 있으면 상대적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파이가 줄어들기 때문에 상대방이 서운함을 느끼기가 쉽다.


발 빼기 싫을 정도로 이미 마음이 퐁당 빠져 있었기에 설령 그가 저 게임 중 하나를, 아니 하나도 아니고 모든 게임을 즐겨한다고 했어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런 게임들은 재미없어서 안 한다고 하니 역시 취향이 잘 맞는다며 오랜만에 내 안목을 칭찬했더랬다.


여기에는 함정이 하나 있었다. 국제 커플의 의사소통은 제2 외국어인 영어로 이루어지는 게 문제였을까? 이 대화를 이해하는 데에 약간의 오류가 있었다. 그는 저런 (단순하고 반복적인)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 게임을 안 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혼자 제멋대로 "저런 (남들 다하는 중독성 있는) 게임을 안 한다니 게임을 즐기지 않는 거군?"이라고 생각해버렸던 것이었다.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전투 파일럿이 꿈이었다는 그는 종종 비행기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곤 한다. 공군 군대를 지휘하며 행성들을 점령하는 전략 게임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전투용 비행기를 조종하는 게임을 했다. 전투 파일럿들도 연습이 필요한데 항상 실전으로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어렵기 때문에 이 시뮬레이터 게임으로 전투 연습을 한다고 한다.

비행 게임이라고는 추억 속의 오락실 게임 갤러그처럼 이성을 읽고 무조건 총을 남발하며 이리저리 피하는 게임밖에 몰랐던 나에게 저 게임은 매우 낯선 신세계였다. 물리학 공식을 적용해서 바람의 방향과 세기, 비행 각도와 엔진의 잔여량을 종합적으로 계산해서 신중하게 비행을 하는 게임이었다. 급하게 상공으로 올라가다가는 중간에 엔진이 떨어져서 추락하기 십상이고, 방향을 바꿀 때에도 바람의 세기와 비행 속도를 고려해서 미세하게 움직여야 했다.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열심히 일하기도 벅찬데 게임에도 이렇게 머리를 쓰고 싶을까 궁금했지만 좋다고 하니 더 캐묻지 않았다.


그에게는 게임이 일종의 도피처이자 치료방법인 것 같다. 유독 몸이 안 좋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저 게임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게임을 하면서 머릿속의 잡생각을 비우고 신체적인 고통이나 심적 복잡함에서 가급적 생각을 멀리해서 머리와 마음이 푹 쉴 수 있도록 만든다고 했다. 처음에는 아프면 그냥 쉬지 뭘 그렇게 열심히 게임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그렇게 게임에 집중하다가 푹 자고 다음날이면 어느새 몸도 마음도 깔끔하게 회복하는 그였다.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에 맞는 만능 치유법을 적용하는 걸 보니, 놀이에 저만큼 진심인 이유가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파일럿에 대한 이루지 못한 꿈을 게임으로 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게임에 진심인 정도.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껏 들뜬 표정으로 택배 박스를 들고 방으로 올라왔다. 가위를 찾는 시간조차 아까운 듯 박스를 손으로 찢었고, 운전 스틱 같은 기구 두 대와 작은 웹캠이 나왔다. 카메라를 컴퓨터 책상 앞에 놓고 센서를 헤드셋에 붙이고, 플레이스테이션용 스틱보다 더 정교하고 복잡해 보이는 운전 스틱 2개가 모니터 앞에 설치되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조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웹캠과 센서 덕분에 360도로 화면을 볼 수 있었다. 직접 전투기에 탑승해서 상공으로 올라가는 느낌, 하늘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느낌까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확신했다. 아마 넓은 집이 생기면 분명 VR 기기와 디지털 Cockpit까지 구매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최근에는 한참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더니 최신 전투기 매뉴얼을 구해서 필기까지 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최근 개발한 최신 전투기라며 새로 공부할 것이 생겼다며 즐거워했다. 모니터 화면을 얼핏 봐도 수십 가지는 되는 똑같이 생긴 네모난 버튼들의 각각의 쓰임새와 사용법을 열심히 공책에 몇 날 며칠을 적었다. 오늘 정말 많은 내용을 공부하고 배웠다면서 눈을 반짝이며 그 어떤 때보다 즐거워하는 그를 보니 즐기는 덕후는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Wilko에서 제일 두꺼운 걸로 골라 샀던 스프링 노트의 마지막 장이 넘어갈 때 즈음 그는 게임에서나마 진짜 파일럿이 되었다. 버튼을 하나씩 누르며 고개를 좌우로 젖히며 하늘을 비행하는 그는 어릴 적부터 그려왔던 꿈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살고 있었다.


재난 영화처럼 전쟁이 일어나거나 드라마 “킹덤”처럼 좀비가 창궐하는 아포칼립스가 펼쳐지면 우리는 근처 비행장이나 공항으로 달려가서 비행기를 운전해서 빠르고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행장까지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누가 우리에게 “자, 여기 비행기 있으니 타고 가시오.”라며 친절하게 비행기를 건네줄 일도 없을 테니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상상이지만 전투기 덕후인 남자친구 덕분에 생존 스킬이 +1 증가했다고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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