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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Nov 03. 2021

내 입술을 훔친 터키 할머니

영국에 있을 때 남자친구는 가끔 유독 큰 소리로 통화하곤 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터키어인데도 귀에 쏙쏙 박혔다. 전화를 끊고 나면 늘 남자친구는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께서 잘 들리시지 않으셔서 늘 크게 말씀하신다고 했다.


할랄 마켓에서 사 온 터키 식재료로 요리할 때마다 그는 할머니의 수제 피자를 자주 그리워했다. 터키 수제 소시지(Suzuk, 수죽)와 터키 옐로 치즈(Kasar, 카샤르)를 넣고 직접 만든 불가리아식 토마토소스(Lutenitsa, 루테 닛사)를 듬뿍 발라 만든 할머니표 피자는 모든 손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음식이자 온 가족이 모이는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메뉴였다.

할머니의 손맛은 그 어떤 식재료보다 강력한 마력이 있다. 터키 할머니가 만드는 음식은 어떨까 궁금했고 나중에 할머니와 가까워지면 꼭 피자 만드는 법을 배우리라 다짐했다.

피자 그리고 할머니의 손맛 (출처: reina)


생각보다 그 기회는 빨리 왔다. 손자가 생각보다 길게 영국에 머물자 행여 외국인을 만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봐 걱정이 많았던 할머니는 손자를 맞이하여 피자를 만들겠다고 하셨다.

무리하시지 말고 저녁을 먹고 갈 테니 간단히 차 한잔 하겠다고 했으나 할머니는 선전포고 하셨다.

"와서 너네가 먹든지 말든지 일단 피자 만들 거다."

그 말을 듣고도 거절할 순 없었다. 아예 이 참에 같이 피자를 만들며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차를 세우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려는데,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소리를 치고 계셨다. 알려주지 않아도 저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가 분명했다. 출발한다고 전화드린 그 순간부터 부엌 창문 너머로 한참 내다보셨을 게 눈에 선했다.



할머니의 겉모습은 발칸반도 할머니 혹은 바부시카(babushka)였다. 바부시카는 러시아어로 머리수건을 뜻하며,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할머니를 의미한다. 러시아, 동유럽, 발칸 반도 일대의 할머니들을 가리킬 때 쓰인다. 실제로 유행이 된 것 같지는 않지만 2019년 패션 스타일 트렌드로 "바부시카 패션"이 소개된 적 있다(참고: 뉴욕포스트).



잠깐의 눈빛 교환으로 본 할머니는 조용하고 차분한 인상이면서도 눈과 꾹 다문 입술에서 단단함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손자에게 별말씀은 안 하셨지만 꽉 잡은 두 손과 일렁이는 눈빛에서 반가움과 행복함이 흘러넘쳤다.

그 눈빛에 약간의 수줍음과 어색함이 더해지면 나를 향한 눈빛이 되었다. 남자친구와의 자연스러운 볼 키스 인사 이후 내 차례가 되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술에 쪽! 뽀뽀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동안 했던 볼 키스 인사는 양쪽 볼에 한 번씩 입맞춤 또는 소리를 내는 방식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입술 박치기에 살짝 당황했다. 러시아에는 존경의 의미로 진하게 입맞춤하는 인사가 있다고 하던데 터키에서도 반가움의 표시로 입맞춤을 하나 보다 싶었다. 너무 당황하면 실례일까 하여 아무렇지 않은 척 집으로 들어가 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형제의 키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 호네커가 동독 정권 30주년을 기념하여 존경의 의미가 담긴 키스를 나누었다. (출처: 하단 표기)


할머니는 우리에게 별다른 일을 주시지 않고 혼자 피자를 만드셨다. 애들에게 시키느니 당신 손으로 직접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별다른 질문을 하시거나 말씀이 없으셔서 외국인이라 어색하신 건지 그래서 마음에 안 드시는 건지 긴가민가 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었다. 같이 사는 고모가 퇴근하고 오자마자 고모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시는 말을 들었다.

"나 저 아이 너무 마음에 든다."


할머니의 고백과 함께 자연스럽게 시작된 식사는 통역을 하느라 한 템포 느리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대화로 가득했다. 할머니께서는 무심한 듯 툭툭 한 마디씩 뱉으시면서도 우리의 농담에 수줍게 웃기만 하셨다. 서로의 근황과 나에 대한 궁금함을 주제로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끊임없는 건 대화만이 아니었다. 수제 피자 특유의 두꺼운 도우와 토핑 가득한 피자를 두 조각이나 얹어 주시고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아이스크림 먹을래, 수박 먹을래, 포도 먹을래 물으시며 대접도 아낌없었다. 남자친구는 도중에 허리띠 버클을 풀었고 나 역시 앉아 있다가 끝에 가서는 거의 배를 반 뉘이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오븐에서 구워진 피자는 한조각씩 (우리는 두조각) 접시에 올려졌다. (출처:reina)

돌아가는 길에 남자친구에게 "터키식 볼 키스 인사에 조금 놀랐어."라고 이야기하자, 박장대소하며 나와 할머니의 기습 뽀뽀를 보고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터키에서는 갓난아기에게도 입술에 뽀뽀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생각보다 빨리 고개를 돌린 나와 그 속도에 맞추려고 빨리 입술을 내민 할머니의 긴장감이 초래한 사고였음을 증언했다.


처음 만난 터키 할머니와 뽀뽀를 했다. 내 입술을 훔친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 입술을 훔친 나. 어찌 되었건 터키 할머니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형제의 키스"사진 출처: Fraternal Kiss between Leonid Brezhnev and Erich Honecker, Marking Thirty Years of East Germany, East Berlin, 1979ⓒBarbara Klemm, Institut fur Auslandsbeziehungen e. V. [사진 고은사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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