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삶을 꿈꿨다. 깔끔하고 냄새에 민감했던 엄마는 동물 키우는 것을 싫어하셨다. 문서로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경제권은 곧 결정권이었으니 부모님이 안된다고 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며 경제력이 생기고 독립도 했지만 여전히 고양이와의 동거는 요원했다.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월세, 전셋집을 구하기 쉽지 않았고 혼자 사는 직장인이 과연 동물을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고양이는 외로움을 덜 타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들도 있었지만 내가 출근하고 나면 좁은 방에서 하루 종일 혼자 있어야 하는 고양이를 생각하면 선뜻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와 너덜너덜해진 몸을 침대에 뉘이기도 바쁜 내가 과연 고양이를 케어하고 키울 수 있을까? 없을 것만 같았다.
터키에 와서 남자 친구 부모님 집에 살면서 세 고양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피하거나 숨지 않는 고양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새 식구로 받아주는 것 같았다. 어느새 정이 들고 애착이 생겨 고양이들이 아프면 속상하고, 기분 좋아 애교 부리면 그 모습이 심장을 간질이는 듯 사랑스러웠다. 처음 생긴 간접적 반려동물 덕분에 동물과 심적으로 끈끈하게 연결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배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지만 닿아 있는 이 마음은 반려 동물이 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했었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동네 시장에서 야채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도로 가운데에 차에 치인 듯한 고양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모여들고 차들은 멈춰 섰으며, 근처 약국에서 약사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분이 나와서 어쩔 줄 몰라하고 계셨다. 우리는 차를 빨리 세우고 고양이를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들 것을 찾았다. 지나가던 여성분께서 본인이 가지고 있던 스카프를 선뜻 내주어 쇼핑백과 함께 안정적으로 고양이를 감싸 올렸다.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는 가슴팍을 보며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양이는 "하아-"하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꿈틀댔다.
"방금 움직였어! 병원에 데려가자."
속도를 한껏 내고 싶었지만 곳곳에서 차가 들이닥치는 좁은 시내 도로에서 속도를 내기란 쉽지 않았다. 겨우 동물 병원 앞에 차를 세우고 그녀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근 부모님 고양이 중성화 수술과 눈 치료로 자주 들렸던 동물 병원이라 상황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녀를 바로 치료실로 옮길 수 있었다. 남자 친구가 차 문을 제대로 잠그지도 못하고 뛰어간 탓에 나는 어정쩡하게 차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을 지켜보았다.
의사 선생님들은 아드레날린 주사를 놓고 심폐소생술을 계속 시행했다. 안타깝게도 고양이의 심장은 도착하기 전 이미 멈춰 있었고 그녀는 살아나지 못했다.
그동안 마주한 고양이들의 죽음은 로드킬 당한 채 길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인 채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고양이를 보낸 적은 처음이었다. 지나고 추정하건대 우리가 들었던 깊은 숨소리는 그녀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최후의 숨이었던 듯하다.
조금 더 빨리 병원에 옮겼다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우리가 고양이를 발견했을 때 고양이를 치고 지나간 차는 보이지 않았다. 도로 한가운데에 고양이 한 마리만 누워있을 뿐이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돌멩이만 부딪혀도 그 느낌이 생생한데, 고양이와 같은 동물을 친 것을 몰랐을 리 없다.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는 마음으로 그냥 지나쳤을지도, 고양이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춰야겠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고양이를 병원으로 데려갈 때 근처에 있던 약국 선생님은 꼭 경과를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살리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니 고양이를 묻어줄 만한 곳이 있다며 가서 묻어주겠다고 해서 고양이의 시체를 전해주었다. 약국 옆에는 물그릇과 빵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아마 그 고양이는 약국에서 매일 밥을 챙겨주던 길 고양이였던 것 같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여 서로에게 애도를 표했다.
살면서 동물의 죽음을 직접 목도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보았으나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매년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께서 키우시던 토종닭을 직접 잡아서 닭백숙을 해주시곤 했다. 멱따는 소리를 선명하게 들었음에도 나는 그 소리와 동물의 죽음을 연결시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시골에서 키우던 개가 사라지던 날, 한밤중에 총소리 이후 멧돼지 고기를 나눠 먹던 날들. 많은 죽음의 순간들에 함께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진짜 죽음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지나가다 로드킬 당한 비둘기, 고양이의 시체를 본 적도 있었다. 안타까웠지만 그로 인해 엄청난 마음의 동요를 느끼진 못했었다.
미처 살리지 못한 그 길고양이도 우리와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던 고양이였다. 그럼에도 고양이의 숨이 붙어있던 찰나의 순간을 공유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그날 하루 종일 고양이에게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던 마음을 떼어 내지 못하고 마지막 숨소리를 지우지 못하고 반복 재생했다. 조금 더 운전을 조심할 수 있었던 배려, 조금 더 병원에 빨리 옮길 수도 있었던 책임감 등이 떠오르며 대신 미안해졌다. 그리고 이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고양이들을 위한 작은 바람으로 이어진다. 길고양이들이 다칠 까 봐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살리려고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다음에 만날 고양이는 꼭 살릴 수 있도록 이 마음을 남겨두겠다.
*썸네일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길 고양이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