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두 여자
[ 사랑 톡톡 가상 인터뷰-스트라빈스키 편]
정 작가 : 선생님께서는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로, 평생 신자들의 모범되는 신앙생활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 : 분명 신은 존재하니까요. 그분에게 기도하고, 그분 뜻을 따르며 살도록 노력한 것 뿐입니다.
정 작가 : 그런데 결혼 후, 왜 그렇게 바람을 피우셨어요?
스트라빈스키 : 사랑에 빠진 것이 죄는 아니잖아요. 대놓고 바람이라는 표현을 쓰다니, 조금 불쾌하군요. 그저 난 결혼 후에도, 순수한 사랑의 순간을 놓지 않은 것뿐입니다.
정 작가 : 기분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만, 베라와 함께 산 이후부터 자녀분들을 위해 생활비도 주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아내께서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는데도, 어린 딸들을 위해 돈을 안 보내셨다는 대목에서 어딘지 모르게 의아하더라고요. 신은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일깨우는 존재 아니던가요.
스트라빈스키 : 깜박 하고 못 보낸 일들이 몇 번 있었던 것뿐입니다. 베라가 늘 아내에게 알뜰살뜰 생활비를 챙겨주었어요.
정 작가 : 만약 생활비를 선생님께서 직접 아내에게 전해주셨다면, 가족들의 고통이 줄어들지 않았을까요. 남편의 내연녀에게 돈을 받는 아내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스트라빈스키 :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 작가 : 베라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차라리 이혼을 하시고, 정식으로 베라와 결혼하시지 그러셨어요.
스트라빈스키 : 버젓이 아내가 살아있는데, 이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차마 그것만은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정 작가 : 베라와 함께 사신 이후로는 다시 아내에게 간 적도 없으시잖아요. 서류상으로라도 부부로 남고 싶다고 아내 분의 말씀이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스트라빈스키 : 아내는 제게 그런 것을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혼하면 신에게 용서받지 못하죠.
정 작가 : 소문대로 선생님은 이혼하면, 신에게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셨던 거군요. 그래서 아내 분께서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듣자마자, 결혼을 하신 거고요.
스트라빈스키 : 모든 것은 신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그분 뜻에 따라 사는 수밖에 없어요.
분명 한 사람이지만 여러 겹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남자이자 음악가. 평소에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로 교회의 정신을 엄격하게 지키며 살았지만, 뒤돌아서면 늘 매력적인 여성들과의 밀애를 찾아다녔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년 6월 17일~1971년 4월 6일).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가이자 현대 음악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그는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과 하이드처럼 살았습니다. 평생 극과 극의 행동을 즐겼거든요.
차라리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바람둥이 캐릭터였다면, 여러 여성들과의 사랑이 당연하다, 그럴 줄 알았다며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요. 그는 누가 보아도 바르고 정직했어요. 또 자신의 직업에 열정적인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사회적 도덕적으로 어긋날 행동을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는데요. 반듯한 모습의 이면에 숨겨둔 그의 또 다른 모습도 있었습니다. 기혼자의 신분으로 여러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며 지내기도 했고요. 심지어 첫 아내가 죽는 날까지 역시 기혼자인 내연녀와 동거를 시작했거든요. 그 와중에 틈틈이 다른 여자들도 만나가면서요!
대놓고 바람피운 유부남
스트라빈스키와 예카테리나 가브릴로브나 노센코 스트라빈스키(Ekaterina Gavriilovna Nossenko Stravinsky, 1880년 1월 24일~1939년 3월 2일)는 1906년 1월 23일 결혼했습니다. 그들이 결혼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요.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사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는 사촌 간의 결혼을 허가하지 않았는데요. 예카테리나의 신원 서류를 조작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가정을 이뤘고요. 4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가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이 부부의 운명은 삐걱거리기 시작했어요.
스트라빈스키는 주로 캬바레나 바, 카페 등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성들과 만나 사랑의 불꽃을 태우곤 했는데요. 파리의 캬바레에서 만난 러시아 댄서 리디아 로푸호바(lydia lopukhova), 젠야 니키티나(zhenya nikitina)와 뜨거운 만남을 갖기도 했고요. 브라질 출신의 가수 베라 야나코폴로스(vera janacopoulos), 베라 수데이키나(vera sudeykina), 그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회고한 요안티나 간다릴리아스(Juanita gandarillas)도 그가 대놓고 바람피운 여성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요. 스트라빈스키가 만났던 여러 여자 중에서 예카테리나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 사람은 베라 드 보세트(Vera de Bosset, 1888년 1월 7일~1982년 9월)였는데요. 둘이 처음 만났을 때, 각자의 가정이 있었거든요.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깊이 빠졌고요. 이후 베라는 남편과 즉시 이혼하고 스트라빈스키를 선택했고요. 스트라빈스키가 참석하는 모든 행사에 함께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아내는 그가 베라를 만난 후 큰 변화를 체감했습니다. 이전까지 그가 잠깐잠깐 만나던 여자들과 달리 이제 더 이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요. 4명의 자녀를 키우던 예카테리나는 무엇보다도 생활비가 가장 급했는데요. 엄마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바람둥이 스트라빈스키는 떠나온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요. 그래서 버림받은 가족들은 무척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훗날 성인이 된 스트라빈스키의 자녀들도 자신들의 아버지를 무척 싫어했는데요.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나 싶네요.
그러던 어느 날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베라는 선심 쓰듯 스트라빈스키의 아내에게 생활비를 건네기 시작했는데요. 스트라빈스키가 베라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 그는 매일같이 유명해지고 있었거든요. 물론 돈도 잘 벌었고요. 그러니 지금까지 스트라빈스키를 내조했던 아내와 가족에게 그 몫을 나눌 필요가 있었겠지요. 정기적으로 베라에게 돈을 받아가던 스트라빈스키의 아내는 심지어 베라와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참 짠합니다. 남편의 내연녀에게서 돈을 받아야 했던 예카테리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각자의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동거했던 스트라빈스키와 베라는 사실혼 관계로 오래 지냈는데요. 둘이 정식 부부가 되기까지는 꽤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스트라빈스키가 신이 무서워 차마 이혼을 못했거든요. 신과 악마의 존재를 믿었던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비로소 베라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의 첫 번째 아내가 병으로 죽어가던 순간의 스트라빈스키는 인생 최대의 빛나는 경력을 뽐내고 있었거든요.
사랑은 창조적 예술의 힘
스트라빈스키는 프랑스의 작곡가 나디아 불랑제(Nadia Boulanger, 1887년 9월 16일~1979년 10월 22일)와 50년 간 알고 지냈는데요. 우연히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아들 음악 교육에 대해서 나디아에게 문의를 했고요. 그 이후로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아들 음악 교육에 대한 의견이나 작곡에 대한 의견 등을 자유롭게 나눴습니다. 전해지는 그들의 편지는 약 140여 통인데요. 그들이 점차 서로에게 사랑을 느꼈다고 판단할 수 있는 편지들이 1990년대에 스위스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둘 사이에 어떤 사랑의 스캔들은 없었기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정말 세상에 비밀은 없는 모양입니다.
참 스트라빈스키와 가브리엘 보뇌르 코코 샤넬(Gabrielle Bonheur Coco Chanel, 1883년 8월 19일~1971년 1월 10일)의 관계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영화나 소설을 통해 둘이 열렬한 사랑에 빠졌던 것으로 포장했지만, 그것은 아니고요. 정확한 사실은 샤넬이 전쟁으로 떠돌던 스트라빈스키 가족에게 자신의 집을 빌려준 일입니다. 샤넬은 당시 파리 뱅돔 광장 리츠 칼튼 호텔의 그랜드 스위트룸에서 살고 있었는데요. 샤넬은 친하게 지내던 예술가 친구들을 통해 스트라빈스키를 알고 있었고요.
이후 샤넬은 스트라빈스키의 예술성에 감탄했고요. 때문에 순수한 후원자의 마음에서 집을 내어준 거죠. 샤넬과 스트라빈스키가 같은 시기에 같은 집에 살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스캔들이 사실처럼 이어진 것은 영화 영향이겠지요. 매혹적인 사랑을 창조의 동력으로 삼았던 스트라빈스키, 그의 음악 세계가 다채로운 것은 그의 마음 속 숨겨진 사랑 때문은 아닐까요.
<아주 사적인 예술>(추명희, 정은주 공저) 중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