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시네마 7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한 평생 한 가지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평생 직장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는 시절은 더 더욱 그렇지요. 사실 평생 한 곳에서 일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직업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겠지만요.
한 평생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살던 한 남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어우러진 영화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클로드 라 롱드 감독). 올해 여든 셋 노익장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 경이 극 중 평생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살아 온 헨리 콜의 내면을 완벽히 연주했고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힘든 한 남자, 헨리 콜의 노년 이야기가 참 아프게 그려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바흐, 베토벤, 슈만, 쇼팽, 리스트 등 서양 음악사의 여러 유명 작곡가들의 피아노 작품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향하는 피아니스트의 깊은 내면과 함께 흘러갑니다. 우크라이나의 피아니스트 세르히 슬로프(SERHIY SALOV)의 연주로 스크린 속 27곡의 피아노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참 이 영화의 본래 제목은 <코다>(coda)입니다. 이탈리아 어로 꼬리 부분을 뜻하는 코다는 보통 서양 음악 작곡 양식에서 마지막 부분을 가리킵니다. 흔히 곡의 앞부분에 등장했던 주제 선율이나 형식 등이 곡의 말미에 다시 한 번 변형되어 등장할 때, 코다가 시작된다고 이해하면 되는데요. 코다가 시작되면 곡이 거의 끝나간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우리말로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로 번역된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코다>입니다. 주인공의 인생 후반부가 마치 코다처럼 연주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일 겁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 쓴 유명항 말로 시작합니다. “음악이 없는 삶은 오류일 지도 모른다”고요. 이어 꽉 찬 객석을 바라보며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베토벤을 연주하던 헨리 콜은 연주 도중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식은땀이 온 몸을 적시는 동안에도 헨리 콜은 곡을 끝까지 연주하지요. 영화 초반부터 굉장히 아슬아슬한 연주 장면이 시작됩니다. 무척 불안한 느낌을 전달해주려는 듯합니다. 금방이라도 연주를 중단한 채 무대 밖으로 뛰어나갈 것 같은 헨리 콜의 표정이 무척 슬퍼보이기도 하고요. 오른손 부분의 악보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연주를 마친 헨리 콜은 무대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세계적인 노익장 피아니스트가 숨을 고르며 불안해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마음은 오로지 아픔 뿐입니다.
아내의 죽음 이후 3년 간 무대에 오르지 않았던 헨리 콜이 무대 공포증을 참아내며 다시 무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헨리 콜은 이 증상을 완전히 이겨낸 상황이 아니었고요.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던 도중 악보를 까먹고 다시 연주하거나 다음 곡 연주를 포기하는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이 때 마음의 안정을 느끼게 해 준 <뉴요커>의 기자 헬렌 모리슨을 만나게 되지요. 케이티 홈즈가 다정하게 연기한 헬렌 모리슨이라는 인물을 통해 헨리 콜은 다시 한 번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설 자신감을 얻습니다.
사실 헬렌 모리슨은 15년 전 헨리 콜을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헬렌 모리슨은 자신의 인생이 전부 바뀌었다고 고백하는데요. 콩쿠르에 떨어진 헬렌 모리슨을 위로해줬던 헨리 콜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었던 거죠. 이런 추억의 연결고리 때문일까요. 헬렌 모리슨은 헨리 콜에게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헨리 콜은 거절했어요. 꽃다발을 보내고 “지나가다 들렸어요”라며 반갑게 헨리 콜이 가는 곳을 찾아오는 헨리 모리슨에게 결국 마음을 연 헨리 콜은 인터뷰를 결심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프랑스의 작은 집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인터뷰를 계속 합니다.
“10대에 슈만이 없었다면 난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지금은 바흐와 베토벤의 축복으로 매일 살고 있지만요.”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중 헨리 콜이 헨리 모리슨과 인터뷰 하던 장면 중에서.
그러다 결국 인터뷰를 통해 자주 만나던 헬렌 모리슨이 헨리 콜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헨리 콜이 홀로 스위스의 질바플라나에 머물며 헬렌 모리스가 거닐던 길을 걷는 장면에서 둘이 결국 헤어졌을까 하는 상상을 해볼 수도 있겠지요. 스위스의 질바플라나는 헬렌 모리스가 15년 전 콩쿠르에 탈락한 이후, 위안을 얻었던 곳으로 등장합니다. 실제로 니체가 영원회귀를 떠올린 장소로 유명한 이곳에서 외로운 표정으로 지내던 헨리 콜은 매니저에게 더 이상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콜은 자신감 넘치는 노익장 피아니스트의 모습으로 무대에 다시 올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헨리 콜의 연주를 통해 행복해한다는 헬렌 모리슨의 말을 떠올리면서요. 또 흡족한 표정으로 헬렌 모리슨이 쓴 자신의 인터뷰를 읽던 헨리 콜의 표정은 밝았습니다. 그가 처음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을 어느 젊은 날처럼,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향하는 길목에서 다시 한 번 코다처럼, 피아니스트로 마지막까지 무대에서 빛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가득한 모습으로요. 헨리 콜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코다를 찾아갈 날이 멀지 않았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중간 중간 힘든 일들이 수없이 반복될 테지만, 결국에는 모두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보면서요!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빛낸 3곡
조르쥬 비제 <카르멘> 중 ‘하바네라’ 피아노 편곡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 조르쥬 비제의 대표 오페라 <카르멘>의 유명 아리아 ‘하바네라’를 피아노용으로 편곡한 작품입니다. 헨리 콜이 연주할 피아노를 고르던 중 당황하자, 헬렌 모리슨이 헨리 콜의 곁에 앉아 함께 연주하던 장면에 등장합니다. 둘의 관계가 사랑으로 발전할 거라는 힌트이기도 합니다.
프레데리크 쇼팽 <발라드 2번, Op.38>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의 대표 작품입니다. 헨리 콜이 재기 후, 연주 도중 큰 실수를 하던 장면에서 연주하던 작품입니다. 마지막 부분의 악보를 잊어 연주를 멈췄던 헨리 콜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도전해 연주를 마칩니다. 이 연주 이후 헨리 콜은 다시 연주할 수 없다고 불안해합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Op.109>
헬렌 모리슨이 15년 전 사랑하던 남자친구가 아주 잘 연주했다고 소개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 3곡 중 한 작품으로, 베토벤의 여러 피아노 작품 중에서도 걸작이라 평가받습니다. 그만큼 연주하기에 어렵기로도 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