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는 엄마를 증오합니다. 그래서 연주합니다”

아주 사적인 영화 리뷰 <뮤직 샤펠>


한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는 수많은 감정들은 그 사람의 삶을 천천히 채워갑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저는, 제 마음 편한 감정들이 많이 모이고 쌓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딱 하나 있다면, 내 마음의 평화라고 생각하고 또 믿는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어디 세상살이가 그렇습니까. 예측불가한 일들은 일상의 한 부분이고, 피하고 싶은 일들은 잊을 만하면 찾아오며, 심지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에 좌절하며 몇 년에 한 번씩 주저앉기도 하지요.   

  

그 수많은 필연의 슬픔 중에서 정말 짜증나고 또 피하고만 싶은 경우를 골라보자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문제나 환경에서 일방적으로 받는 상처입니다. 예를 들자면 가족 간의 문제 등요.


나는 부모나 형제를 선택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것이 가족 문제의 원론적인 어떤 슬픔은 아닐까 생각합니다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알콜 중독에 가정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다거나 태어나보니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낳아 기르던 사람이었다거나 하는 정말 내가 미쳐 손도 써볼 수 없던 영역의 아픔들요.      


또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이 살면서 가장 큰 비참을 느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가능하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증오하고 싶지 않아요. 특히 이를테면 내가 선택할 수 없었지만 내 삶을 온통 채운 가족을미워하는 일이지요.


우리 엄마니까 우리 아빠니까 또 언니와 동생이니까 내가 참고 넘어갔던 시시콜콜한 아무 일 아닌 그런 일부터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의 분노를 느꼈어도 그것을 차마 말 하지 못하고 넘어가야 했을 때처럼요. 이런 일은 누구나 한 번쯤 가슴에 묻어둔 사연이라 생각합니다.

 

아주 사적인 영화 리뷰로 음악 영화 <뮤직 샤펠>(the chapel)을 소개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어리고 여린 한 소녀, 제니퍼가 겪었던 가정 폭력의 모든 장면들에 진심으로 참 아팠습니다. 그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데다가 천재성을 가진 어린 아이였기에 더더욱 자신의 상황에서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자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넌 미국에 가서 살게 될거야.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될거야. 넌 특별한 아이야.”     


어린 제니퍼는 어려서도 커서도 어머니에게 칭찬 같은압박 혹은 그 어떤 것이라도 부담스러운 말을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마음 한 편에는 어머니를 증오하지만, 제니퍼는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살아가지요. 어머니의 주문처럼 제니퍼는 뉴욕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합니다. 어린 시절 제니퍼가 살았던 벨기에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콩쿠르, 퀸 엘레자베스 콩쿠르 참가를 위해 홀로 떠납니다. 예상대로 제니퍼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리스트에 선정됩니다. 그리고 파이널리스트는 누구나 예외없이 참가해야 하는 뮤직 샤펠에 도착하며제니퍼와 뮤직 샤펠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영화의 배경이자 실제로 벨기에에서 열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오랜 역사와 함께 독특한 파이널 전통이 있습니다. 세미파이널에 24명, 파이널에 12명을 뽑고요. 12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벨기에 워털루에 위치한 퀸 엘리자베스 뮤직 샤펠에 7일 동안 머물며 외부와 단절된 채 지내야 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을 위해 창작된 새 협주곡을 익히며 콩쿠르 결선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해야 합니다. 이 전통은 성악 부문은 제외합니다.   

   

<뮤직 샤펠>은 실제 퀸 콩쿠르 파이널리스트들이 뮤직 샤펠에서 보내는 일정을 바탕으로 흘러갑니다. 제니퍼를 포함한 12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예외없이 뮤직 샤펠에 도착합니다.


제니퍼는 결선 무대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선택했습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이 작품을 통해 슬픔을 딛고 일어섰는데요. 제니퍼가 이 곡을 결승에서 연주하고 또 무사히 마친 모습은 어린 제니퍼가 그동안 애써 피했던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솔직히 마주하고 그것을 해결하려 일어섰다는 결심이라는 확신도 들었습니다.

  

평생 숙원이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 제니퍼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 연주를 온 열정으로 마칩니다. 대기실에서 쉬던 제니퍼는 뜻밖의 방문을 받습니다. 절대 제발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지 말아달라 부탁했던 제니퍼의 엄마가 기어코 온 것입니다.


자신의 대기실에 불쑥 찾아온 엄마를 향해 제니퍼는 절규를 퍼붓습니다. 제니퍼와 엄마는 보통의 어머니와딸의 갈등과 비교할 수도 없는 어떤 끔찍한 벽으로 갈라진 지 오래입니다. 제니퍼의 마음 속에서 먼저요. 사이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극이 감춰져있었으니까요.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힌 어느 밤, 제니퍼는 아버지를죽게 내버려 둔 어머니를 향해 키웠던 배신감과 증오를 떠올립니다.


그 모든 비극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폭발합니다.


그리고

제니퍼의 모습과 시리도록 아름다운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이 어렵게 무겁게 그리고 눈물겹게 흐릅니다.      


나는 엄마를 증오합니다.

그래서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라고 말하는 제니퍼의 표정이 들리는 듯 한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꺼내보고 싶고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로 남을 듯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답답합니다 feat. 로댕과 모차르트, 쇼팽과 로마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