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살아낼 자신은 없습니다
이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는,
요즘 들어 부쩍 삶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을 애써 밀어내기보다는,
차라리 외면하지 않고 기록해 보기로 했습니다.
자살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일이라고들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그렇게 배워왔고,
저 역시 그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40초에 한 명씩,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 숫자를 떠올리면 놀라기보다 오히려 멍해집니다.
저는 청소년기 때부터 종종
죽음과 자살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무기력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면
‘죽을까, 말까’ 하는 생각이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생각은 딱히 특별하지도, 극단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두가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저 말하지 않을 뿐이라고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비교적 최근,
제가 아끼는 사람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친한 남자 동생과 일정이 맞아
호수공원 5km를 뛰던 날이었습니다.
운동을 마치고 게토레이를 나눠 마신 뒤,
차를 가져온 제가 그 애를 집 앞까지 태워다 주고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는 여행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누나 여행 좋아하잖아. 어디 가고 싶어?”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저는 방학마다
역마살이 낀 사람처럼 이 나라 저 나라를 원 없이 돌아다녔고,
그 기록을 담은 여행 블로그를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여행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습니다.
국내도, 해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딱히 새로 가보고 싶은 데가 없어.
이제는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잘 안 떠올라.”
“진짜?”
“여행 말고도 사실 인생에서 해보고 싶은 건 거의 다 해본 것 같아.
그래서 별로 삶에 미련이 없어.
당장 죽어도, 그렇게 슬플 것 같지 않아.”
말을 하고 나서도
저는 그 문장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오래된 생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구나.”
그때 당혹스러워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루고 싶은 것도 많고 야망도 큰 아이였기에
제 말이 더 낯설었던 모양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처음으로
‘혹시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 번은 친한 여동생과 식사하던 자리였습니다.
눈이 동그랗고 예쁘장한 그 동생은
유난히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니, 나는 진짜 오래 살고 싶어. 절대 자살 안 해!
그러니까 혹시 내가 실종되거나 갑자기 죽으면 절대로 자살 아니야.
끝까지 파헤쳐줘야 해.”
눈을 반짝이며 말하던 그 아이를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웃음이 터졌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너의 삶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인가.
모두가 죽음을 전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던 걸까요.
저 혼자서만 그쪽을 자꾸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요.
삶이 완전히 무의미해지고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저는 제 수명을 끝까지 살아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아흔 살에 병상에 누워
임종을 기다리는 저의 미래는
제 상상 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제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그렇게 서른이 넘어서였습니다.
그전까지는 다들 비슷한 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자살에 관해
조금 더 깊이 탐구하고 싶어졌습니다.
이 생각이 정말 저만의 것인지,
아니면 말해지지 않았을 뿐 어딘가에 더 있는 것인지.
우리 사회에서 자살과 자살에 관한 이야기는
일종의 금기처럼 취급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살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고,
물어보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자살을 마주합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건너 건너 지인의 이야기로,
혹은 연예인의 뉴스로.
다만 그 이야기를 쉬이 꺼내지 않을 뿐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그토록 살고 싶어 하고,
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쉽게 죽고 싶어질까요.
저는 그 질문에서 도망치지 않고
천천히, 끝까지 써 내려가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