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안 우울한데 우울증이라고?

나의 첫 정신과 진료 일지

by 이천형

평범한 어느 주말이었습니다.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성인 ADHD 관련 영상을 하나 보게 됐습니다.


일이든 집안일이든

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습관,

자잘한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시간 약속도 자주 어기고,

한 번 꽂히면 밤을 새우는 과몰입,

싫은 건 정말 죽기만큼 하기 싫고,
집중도 잘 안 되는 상태.


'이거 완전 나잖아?'


저는 그날, 제 스스로를 성인 ADHD라고

거의 확신했습니다.

ADD(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ADHD)라서
그동안 몰랐던 거라고 생각했고요.


실제로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니
약을 먹고 세상이 달라졌다고들 했습니다.

설거지도, 청소도, 아무리 귀찮고 하기 싫은 일도
'그냥' 하게 된다고요.


살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를

'근면 성실한 사람'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자존감도 많이 무너져 있던 시기였습니다.


세상이 나한테만 유독 버겁게 느껴졌던 이유를
마침내 찾아낸 것 같았습니다.


각종 진단 후기와 치료 일화, 약 효과와 부작용까지
몇 시간을 꼼꼼히 찾아본 뒤

ADHD 수기 책을 몇 권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설렌다고 해도 될지 모를 마음을 안고 잠에 들었습니다.


'일요일엔 책을 읽고,

월요일이 되면 정신과 예약을 해봐야지.'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집 근처 정신과에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었지만

예약은 기본이 한 달 뒤,

어떤 곳은 6개월 뒤라고 했습니다.


결국 예약 없이 현장 접수만 받는 병원을 찾아

몇 시간을 기다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처음 정신과에 들어갈 땐 기분이 조금 묘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학생들과 또래로 보이는 평범한 젊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힘든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 선생님이

여러 장의 검사지와 문장 완성 검사를 건네주셨습니다.


"저는 ADHD 검사만 하러 온 건데

이런 것도 다 해야 하나요?"


"네. 상담받으려면 기본적으로 하셔야 해요."


귀찮은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얼른 체크해 넘겼습니다.




'이천형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어떻게 오게 됐는지 묻는 질문에

제 인적 사항과 지나온 삶,

그리고 왜 ADHD라고 생각했는지를 차분히 설명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반장이었다고요?'

'벼락치기를 해도 성적은 잘 나왔고요?'

'입시는요? 취업은요?'

'집중력은 언제부터 떨어졌어요?'

'어릴 때도 그랬나요?'


몇 가지 질문이 오간 뒤

선생님은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습니다.


"음... 원하시면 ADHD 검사는 해볼 수 있어요.

그런데 제 소견으로는

ADHD가 아닐 확률이 높아요."


"정말요? 왜요?"


"사전 검사지 결과를 보면
심한 우울증, 그것도 만성 우울증일 확률이 높아요.

아마 우울증 때문에 주의 집중력이 떨어진 걸 거예요."


순간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우울증이라니.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우울증이요?

... 저 하나도 안 우울한데요?"


그래도 ADHD 검사는 하겠다고 했고,
그날 여러 검사를 마치고 병원을 나왔습니다.


머릿속엔 수백 개의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습니다.




며칠 뒤 다시 찾아간 정신과.

검사 결과는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중증 우울증.

전형적인 우울 그래프.
꽤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이며

그 정도도 꽤 심한 편이라고 했습니다.

(*ADHD 검사도 일부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지만,

우울증이 호전된 뒤 재검사를 권유받았습니다.)


제가 몰랐던 이유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자각할 수 없었던 게 당연했습니다.

자각할 수 없다기보다는,

자각하지 않으려 했던 쪽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가면 우울증'이었거든요.


겉으로는 우울해 보이지 않고,

신체 증상이나 지나치게 밝은 태도로 나타나는 우울증.


저는 살면서 '밝은 에너지가 넘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성격도 외향적인 편이고, 잘 웃고,

분위기 맞추는 일에는 유난히 능숙했으니까요.


그래서 아마 저를 실제로 아는 사람이라면

브런치에 이런 글을 쓴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지도 몰라요.

겉보기엔 우울이나 무기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오히려 너무나 잘 지내는 사람 같으니까요.


사실 지금도 제가 우울증이라는 사실보다
우울해 보이는 사람이 되는 게 더 두렵습니다.


주변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고,
약해 보이고 싶지도 않고,
제 감정을 마주할 여유도 없어서요.


그래서 늘 밝은 말과 행동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가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면 우울증이 발견도 어렵고,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의아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울이라고 하면 늘 기분이 슬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울감'과 '우울증'의 가장 큰 차이는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의 차이라고 합니다.


늘 죽음을 떠올려왔던 저는
단순한 우울감이 아니라 우울증이 확실한 셈이겠죠.


이 브런치 글을 쓰는 일은

저에게 처음으로 가면을 벗고

제 감정을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제가 언젠가 괜찮아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우울증인 나를 받아들이고 나서
오히려 더 우울해졌으니까요.


대신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얻고 나서
저는 스스로를 더 면밀히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우울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나는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삶의 끝을 상상하게 되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을 계속 살아오게 만든 건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나는 앞으로 무엇에 이끌려 살아가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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