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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Jan 11. 2022

막연한 두려움이 덮칠 때, 나를 떠올려줘.

열두 번째 공백

덜컥, 아무런 이유 없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어느 날에 한 순간, 또 잃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지금 내 행복이 이대로 끝인 건 아닐까. 지금 나는 잘하고 있는 건지, 무엇을 더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당장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서서히 눈을 뜬다.



***



해가 짧아져서일까, 길어진 밤만큼 내 생각의 꼬리도 한없이 길어졌다. 그림자를 통째로 삼킨 것처럼 끝을 모르고 늘어진다. 그러면 어김없이 꼬리의 끝을 말고 나의 오랜 친구가 찾아온다. 밤을 좋아하고, 고요한 새벽을 좋아하고, 나의 불안과 외로움을 사랑하는 고약한 성격의 친구. 우울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오랜 벗은 아직 어릴 적 모습 그대로라는 점이다. 나는 아주 조금 늙었고, 그는 아직 많이 어렸다. 어린 날의 나를 꼭 닮은 채로.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까?”


친구가 물었다. 하지만 딱히 할 얘기는 없었다. 멍하니 휴대폰을 만지고 있으면, 친구가 다시 물었다.


“그럼, 옛날 얘기를 해볼까?”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고개를 들고 그를 마주하면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기묘하게도, 그것은 그의 애정이 가득 담긴 이야기였다.



***



아침에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했던 생각.

그건 ‘왜 눈을 떠버린 걸까’하는 의문이었고,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울다 잠든 아이에게는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한 가지, 아이는 눈을 뜨고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실은 지독한 주문을 걸어뒀거든. 끝없이 불행해지는 주문. 스스로가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주변 사람들이 누구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기만 하고, 네 고통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끼도록.

꼭 진공 속에 갇힌 것처럼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어도 들리지 않고, 걱정해주어도 ‘그러다가 금방 질리겠지’하는 부정적인 생각만 할 거야.


그렇게 아이는 매일을 불행하게 보냈어. 매일 밤마다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면서, 하루 종일 부정해온 현실을 마주하며 울다 잠이 들었어.  아빠였던 사람은 이제 정말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고.



“하지만 아까 말했지? 주문을 ‘걸어뒀다고’.”
“나는 아이가 주문에 ‘걸렸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아이에게 주문을 건 것은,

다른 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어.

자신의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것들이 한 번 털어놓는 것으로 끝날 리 없다는 걸 알았던 거야. 한 번 누군가에게 걱정과 위로를 받으면 계속, 계속 받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외로움과 불안, 슬픔을 계속 토해낼까 봐, 그러다 결국 그들이 견디지 못하고 나를 떠나버릴까 봐 무서웠어. 스스로도 제 감정의 끝을 알 수 없었어. 하지만 하나는 알았어. 분명 그 끝을 보기도 전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릴 거라는 걸.

아이는 더 이상 무엇도,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어. 또 누군가가 나를 두고 떠나는 게 싫었어. 그럴 바에는 내가 먼저 떠나고 싶다고 매일 같이 빌었어. 이런 ‘불행한 삶’ 따위 얼른 끝나버리면 좋겠다고, 마치 주문처럼 되뇌었어. 하지만 아이에게는 매일매일 멀쩡한 아침이 돌아왔지. 너무 멀쩡해서 이질감이 느껴질 만큼.


매일 울고, 매일 두려워하면서

아이는 매일매일 살았어.

살아 있었어. 항상.



***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가 찾아올 때면 매일같이 들려준 뻔한 이야기, 지겨울 정도로 반복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하나 빼먹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되묻자, 이야기를 끝내지 않은 친구가 나를 똑바로 마주했다. 아무 말 없이 가만있다가, 천천히 그의 손으로 내 눈을 덮었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걸 알면서, 그래도 눈을 감아보라는 듯이.


“그래서 잃지 않았잖아, 네 소중한 것들을.”

“더 많이 생겼지. 불행한 삶으로 멋대로 정의 내린 세상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온 너에게, 네가 불행하지 않기를 바라 주는 소중한 인연들이. 이제는 함께 행복하자고 먼저 말해주잖아.”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 너는 조금씩 천천히 그들과 함께 행복해질 거야.”


이야기의 결(結)이었다. 나는 다시 떠올린다. 매일같이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었던 나의 어린 날들을. 나에겐 너무 큰 당신이 사라져버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당신이 너무 필요했던 어린 나를.

그리고 삶의 끝, 낭떠러지에 다다른 듯한 순간마다 나를 불행의 무덤 속에서 끌어올리고 만 이들의 존재를.



***



물론 여전히 크고 작은 불행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은 내 행복을 갉아먹고 계속해서 자라난다. 사라지지 않고 끝없이 나를 찾아온다. 그런 순간마다, 전부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두렵고, 막막하고, 도저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그 모든 순간을 지나 지금, 오늘까지 살아온 과거의 나를 돌아본다면 스스로를 불행하고 불쌍하게 여기기보다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워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여기지 못하더라도, 나보다 더 나를 기특해하는 이들이 있어서 나도 그럴 수밖에 없다. 모두 내가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덕분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두려움과 불행이 또다시 나를 덮쳐올 때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지나온 시간 속의 ‘나’를 떠올린다. 이 마음을 견뎌내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또 한 번쯤은 행복한 날이 올 것이다. 어쩌다 너무 행복해서 불안한 날조차도, 그다음의 행복을 위한 날이라고 여길 것이다. 힘들어도, 어찌할 수 없게 서러워도 언젠가, 오늘을 돌아볼 수 있는 미래가 되었을 때 나는 더 단단해질 것을 믿는다. 나 스스로가 그 증거인 셈이니까.


오랜 친구가 감겨준 어둠이 밝아올 즘에, 내게는 뒤늦게 느긋한 졸음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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