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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Jan 14. 2022

이제는 너희가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열세 번째 공백

얼마 전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모두를 만날 수 없는 게 아쉬웠지만, 조만간 다 같이 만날 날도 오겠지 싶다.

아무튼 신년이 되어 만나자마자 하는 얘기는 늘, 언제 이런 나이가 되어버렸냐는 것이다. 시간이 참 눈 깜빡 사이에 흘러버린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것도 벌써 반년 전이란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어느새 제법 되었다.

그런데도 만날 때마다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유치한 대화들이 오가고, 여전히 10년도 더 된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고, 사소한 것에도 그때처럼 꺄르르 숨넘어가듯 웃는다. 그래서 너희와 함께할 때면 매번 마음이 편하고,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즐거웠다.


집 앞 편의점에 간식거리를 사고 오는 길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평범하게 이 동네도 전에 비해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였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동안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변한 것들을 하나씩 짚었다.

그 순간 내 눈앞에 우리의 어릴 적이 문득 스쳐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싫지 않은 위화감이 들었던 탓이다.



***



10대의 나는 ‘아빠의 부재’를 설명하는 걸 아주 어려워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그때는 더더욱 어려웠다. 다 같이 서로의 가족 얘기를 하다 보면 내게서만 빠져있는 아빠의 존재, 다른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는 어때?라고 물었을 때 부자연스러운 표정 변화나 한 박자씩 늦는 대답, 과거형뿐인 우리 아빠의 이야기…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눈치챌 법한 것들이었지만, 그것까지가 나의 최선이었다.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을 괜히 나 때문에 망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빠가 살아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알려줘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나와 둘이 있을 때, 친구가 조심스럽게 우리 아빠에 대해 물어본다거나 내가 나의 감정상태를 도저히 숨기지 못하고 당장 토해내야만 했던 순간들이 그랬다.

그때마다 나는 항상 생각했다. ‘가족사’라는 건 대체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 분명 상대가 꼭 알아야 하고 알고 싶어 하는 영역은 아닌데, 그렇다고 모르면 실수하거나 상처주기 쉬운 것이었으니까. 내가 알려주는 입장일 때는 더 난감했다. 어찌 되었든 상대를 곤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아빠의 얘기를 했다. 그때 내 이야기를 들은 너희의 표정이나 목소리, 나 대신 울음을 참고 나를 끌어안아주던 작은 품들이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그렇게 얘기를 꺼내고 나면 마음이 편할  알았는데, 어떤 때는 말하기 전보다  무거워지기도 했다. 내가 우리 아빠의 얘기를  것은 너희가  눈치를 보길 바래서가 절대 아니었으니까. 욕심이라는  알면서도, 이야기를 듣고  뒤에도 친구들에게 우리 , 우리 가족, 우리 아빠가 불편해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아빠들의 이야기를 하다가도 내 눈치를 보지 않고 자연스레 함께 웃는 지금의 너희를 보면서.


나는 그게 진심으로 기뻤다.



***



나도 여전히 어렵다.

사람은 경험한 만큼 이해할  있다고 하지만, 이해한 만큼 상대를 향한 말과 행동에 ‘부담스럽지 않은배려를 담아내기가 어렵다.  역시 가족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지인들에게(혹은 다른 경우에도)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어떤 표정과 목소리로 어떻게 그들을 대하는 것이 실례가 되지 않을지, 매번 마음이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같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이해는 어떤 것이든 그저 고마울 뿐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으므로. 내가 시간과 함께 나의 감정을 견뎌내는 동안, 나와 전과 다르지 않게 지내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게 실은 가장 어렵다는 것도 알아.

그래서 정말 많이 고마워, 편히 웃어줘서.


올해는 너희가 더 많이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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