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떤 책은 거름이 되어 내 영혼의 양분이 되었다

by 쓰는교사 정쌤

모든 책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어떤 책은 읽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읽으면 이 책이 이랬었나? 싶을 때가 많다. 분명 읽으면서 많이 울기도 하고 깔깔 웃기도 많이 했던 책들이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다니 참 신기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책을 내 영혼의 양분이 되어준 거름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들에 대한 기억은 사라졌지만 이 책을 읽던 그때의 감정이나 내 마음의 요동침은 나에게 온전히 남아 그 순간들로 데려가 준다. 기억도 나지 않는 내용들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쑥쑥 자라게 하였음을 나는 안다.

고등학생 때 이사를 갔는데 집 앞에 초등학교와 도서관이 있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고 공부를 하던 때라 야간자율학습이 없는 날은 언제나 도서관에 갔다. 내 학창 시절 중에 제일 많은 책을 읽었던 시절이었다. 그때 여명의 눈동자 드라마가 인기가 많았는데 그 시기에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다. 제일 뿌듯했을 때가 태백산맥 10권을 모두 읽었을 때다. 2권씩 빌려 가며 다음 책이 있기를 바라며 얼마나 가슴 조리며 책을 읽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은 다음 번호의 책이 대출 중이라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다.


바로 빌려 읽은 책들보다 10권의 책을 다 읽기 위해 빌릴 때마다 조마조마하고 한 주씩 더 기다리는 시간도 있었던 태백산맥을 다 읽고 났을 때의 희열은 잊지 못한다. 그때부터 책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그전의 책 읽기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처럼 한 것이라면 그 이후의 책 읽기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그 뒤로 나에게 책은 친구였고 내 삶의 동반자였다. 적은 용돈이었지만 때때로 책을 샀고 책을 선물 받기도 했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그 책들을 다 기억하기란 힘들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양귀자 작가의 [모순]을 대학생 때 읽었다. 그 당시 함께 읽었던 책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었다. 이런 책들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없다. 다만 이때 이런 책들과 함께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당시에도 내 안에는 ‘왜?’가 많았다. 일기에 책을 읽고 감상을 적어놓았다. 지금 읽으면 어렸구나 싶은 글들도 꽤 있다.

어렸고 즉흥적이었고 깊지 않은 시절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역사소설, 대학생 때는 여류작가들의 소설과 에세이를 좋아했다. 공지영, 신경숙, 양귀자, 윤정모 작가의 글들을 읽었다. 소설을 읽고 나면 한참을 책 속 주인공의 마음으로 일상을 살았다. 그래서 감정이 힘든 날도 있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자기 계발서를 읽고 일이나 재테크와 관련된 글을 읽고 나서부터는 소설을 쉽게 읽지 못한다. 감정이입을 깊이 하다 보니 일상을 살 때 마음에 부침이 생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패션 유행처럼 나이를 들면서 내가 읽는 책들은 다양한 장르를 거쳐왔다. 고등학교를 시작으로 대학생, 취업 후, 교사로 살면서, 엄마가 되면서, 워킹맘으로 살면서 참 많은 책들을 읽어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많은 책이 다 기억나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 예전에 읽었는데” 정도인 책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잘 기억나지 않는 책들은 내 안에 들어와 온전히 거름이 된 것이다. 그 거름으로 내 영혼이 자랐다. 어느 부분은 뾰족하고 어느 부분은 둥글게 그때마다의 섬세한 감정을 담아서 내 영혼이 자란 것이다. 그렇기에 기억나지 않는 그 책들도 소중하다. 책을 읽었던 나의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온 것이기에.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을 때, 내 인생의 미래가 가장 암담했던 때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 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일기를 썼던 날들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것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쥐어짜며 살았던 시기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항상 고민했고 그런 내 마음을 일기에 담아 놓았다. 그 무료하고 무엇이 될지 생각도 못하던 시절, 기억도 나지 않는 나를 키워주고 간 소중한 책들은 아무것도 아닌 내가 무엇이 되도록 거름이 되어 보잘것없던 나의 영혼을 살찌웠다.


누군가 힘든 터널을 걷고 있다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책이 그 시간을 함께 견뎌줄 것이라고 전하고 싶다. 나를 키워냈던 책들처럼 그렇게 해 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떤 책이어도 괜찮다. 그 책이 다가왔다면 그 책은 이미 당신 영혼의 거름이 될 준비가 되어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후크 선장의 시계처럼 내 안에 삼켜진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