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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교사 정쌤 Oct 25. 2023

무기력한 교실이 늘고 있다

지금 학교는 

무슨 말로 시작을 해야 하나 썼다 지웠다...

두 달 전과 다름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는 이야기하겠지. 

'교사 그만두면 되었지, 왜 죽어?'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우울증에 걸려 있는 그 순간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건강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우울증에 걸리면 현명한 판단이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우울증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다. 마음이 아픈 병이다. 나는 왜 교사가 그렇게 마음이 아프게 되었을까 궁금함이 먼저 생긴다. 가족을 생각하지도 못할만큼 그를 병들게 한 것이 무엇일까. 



복직하고 돌아간 학교는 여전했다. 관리자가 되는 사람들 중에 좋으신 분들도 간혹 계시지만 대부분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만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관리자가 되었다. 교직 내에서 승진 체계는 그런 편이다. 그것도 남들보다 빠른 나이에 된 경우가 많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를 할 생각은 없다. 예외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리고 아이들과 지내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굳이 관리자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하다 문제가 생기면 관리자들은 교사 개인에게 잘못을 물으려고 한다. 그게 문제 해결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10년 전에도 학부모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강요한 관리자를 보았다. 교장실에서 학부모, 해당 교사를 불러다 놓고 그렇게 일을 진행했다. 동료교사들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해당교사와 그 동학년 몇몇만 알고 지나가는 일이 되어버렸다. 당사자가 모든 걸 떠안고 가는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관리자는 여전히 학부모 편에서 교사를 재촉한다. 나는 학교에서 죽음을 택한 교사들에게 그들을 대변하는 관리자가 있었다면 과연 그들이 죽음으로 답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직도...



나는 요즘의 교육문제는 아무래도 곪고 곪아서 지금 터지는 것 같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지금 이렇게 곪고 곪아 터져 나오는 절규들에 학교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모두 평화롭다는 것이다. 모두 그냥 일상을 살아간다.



교직을 사랑하던 사람들만 이 괴로움을 온전히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 말하지 못한 채 아픔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복직하면서 세 학년의 체육전담을 맡았다. 복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을 했던 한 반의 이야기이다. 그 반은 다른 반들과 다르게 내 말이 튕겨져 나감을 느꼈다. 다수의 조용한 아이들은 큰 목소리 내는 아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그냥 가만히 있었다.



다른 반 수업한 것보다 많은 에너지를 썼다. 지난 학기에 절반의 여학생이 아프다고 앉아서 체육수업을 참여하지 않았다는 반이다. 어제는 여학생들 모두 왕복 달리기를 참여했다. 아프다고 쉰 학생은 남학생 두 명뿐. 수업을 마치며 수업에 잘 참여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마쳤지만 나는 수업 후 많은 생각에 빠졌다. 나 스스로 한 생각이 참 안타까웠다.



괜히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수업을 한 것인가.

괜히 안 듣는 애들 주의집중 시켜서 가르친 것인가.

괜히 안 하는 애를 귀 기울이게 하고

괜히 학교는 노는 곳이 아니라 공부하고 배우는 곳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한 것인가.

괜히 준비운동 안 하는 학생들을 쳐다보며 준비운동하게 만들었는가.

괜히 잘하는 학생들을 칭찬하며 사기를 끌어올렸는가.

괜히 떠드는 학생에게 수업시간에 떠들지 말라고 했던가.

괜히 위험한 행동을 하는 학생에게 눈짓을 주고 하지 못하도록 제지했던가.

괜히 수업내용을 기본에 충실하게 구성했던가.

괜히 학생들이 좋아하는 즐거움에 맞추지 않았던가.

괜히 바르게 줄을 세우고 기본교육에 힘을 썼던가.

...



수업이 끝나고 내가 고민한 것은 수업시간에 가르친 내용 전달의 문제가 아닌 '괜히 수업에 진심을 다해서 혹시나 학생들의 기분상해죄에 걸린 것은 없는지'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었다.



수업을 할 때는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기본교육에 힘썼지만 가르치고 나서는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의 앎이 아닌 기분 상해가 없었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신문기사를 보고 청주와 대전의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학교는 괜찮아질 수 있을까? 지난 학기 여학생의 절반이 앉아있는 체육수업을 했다는 것은 아이들의 기분 상해를 방지하기 위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 하고 모두 들어준 수업이다.




지금 학교는 학생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경계를 제대로 세워주지 못하고 있다. 아동학대법이 교사들의 가르치는 행위조차 정서학대로 고소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교사가 경계를 세우지 못하는 교육의 문제는 학교에 공부하고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이 학생들이 그림자처럼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규칙을 지키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학생들은 목소리 큰 학생들의 수업방해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다. 조용히 그 생활들에 익숙해져 가고 스며들어간다.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생활들이 익숙해져서 "저희 반 원래 그래요."라고 말한다.



폭력에 익숙해져 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런 교실에서 약한 학생들은 그저 조용히 숨 쉬고 그림자처럼 있다가 집으로 간다. 아니면 센 학생들 옆에서 잠시 기웃거리며 웃어주다가 집으로 간다.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안타까운데 답이 안 보인다.



학교는 작은 사회다. 자기만 중요하고 목소리 큰 사람이 갑질하는 세상, 학교도 마찬가지다. 교사가 제지하고 경계를 세울 수가 없다.



두 달 동안 거리 위에서 외쳤어도 그 사이 다섯 분의 교사들이 죽었다. 경력이 짧은 교사들도 아니었다.

20년이 넘고 30년이 넘었어도 넘을 수 없는 벽이었나 보다.



아동학대법 개정이 꼭 되어야 한다. 지금 이 상태로는 모두가 아프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조차 제 때에 제대로 된 교육과 치료를 받지 않아서 문제행동이 더 커진다. 다른 무엇보다 교사가 교육활동으로 하는 것은 아동학대법에서 제외되어야 올바른 교육이 가능하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불가능하다. 이미 무기력에 빠진 교실들이 많다. 목소리 큰 몇몇에 휘둘리는 교실이 많다. 알지만 모두 묵인한 결과이다. 내 아이 기분상해죄로 일어난 일들이다.



지금 거리 위에서 외치는 교사들의 목소리,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는 그들 마음속의 작은 촛불, 작은 불씨, 아직은 교직에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음, 그것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지켜주는 것은 사회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각자의 자리에서 자녀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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