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나의 자유시간
소송이혼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사전판결이 내려와 양육비지급을 받고 아이의 면접교섭을 진행하게 됐다. 면접교섭이란 비양육자와 자녀가 만나는 시간이다. 당연히 이혼을 하더라도 비양육자도 자녀를 원하는 만큼 볼 수 있어야 한다.(폭력등으로 자녀에게 접근금지 처벌이 내려올 경우는 예외다) 하지만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닌다면 어린이집 스케줄, 양육자와 비양육자의 스케줄에 따라 통상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1회 정도로 정해진다. 나의 경우에는 아이의 연령과 우리의 스케줄을 고려해 이주일에 1회 주말에 보는 걸로 결정되었다. 사실 양육비를 이행하는 것만큼 면접교섭을 이행하는 사람도 적다. 우스갯소리로 양육비&면접교섭을 잘 이행하면 상위 10%라는 말도 있더라. 놀랍게도 그는 최악의 남편에서 이혼 후 상위10%의 남자로 둔갑했다. 이제 1년밖에 되지 않았고 언제라도 상황이 변할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그에게 아주 감사한 마음뿐이다. 한 집에 살았으면 자기 자식을 보는 게 당연하지 뭐가 고마운 일이냐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와 나를 옭아매던 의무가 사라지니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됐다. 됐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모습이다. 매일 증오로 얼굴을 맞대는 것보다 이렇게 서로(? 그의 감정까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감정만 가지게 되니 역시 이혼이 우리에게 맞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혼 전에 한 시간도 없었던 때에 비하면 한 달에 14시간이라는 자유시간은 나에게 꽤 소중했다. 내가 오히려 면접교섭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늦잠을 자는 아이를 깨워서 아침을 먹이고 짐을 챙겨서 집 앞으로 데리러 오는 아이아빠의 차에 실어 보낸다. 처음에는 그 짧은 시간도 그와 얼굴을 맞대는 게 불편했다. 면접교섭을 시작하고 10개월 동안은 인사는커녕 서로 눈길도 스치지 않았다. 아이에게는 "우와~ 아빠가 00이 보고 싶어서 왔네~ 저기 봐~" 신나는 목소리로 말해놓고는 목소리와 매칭되지 않는 그 굳은 표정이란.. 1년이 넘은 지금 시점에서야 겨우 아이가 뭘 먹었는지 오늘 뭘 하고 놀았는지 등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전 시아버지의 장례식이 있고 난 이후로 불편한 무드가 좀 풀어졌지 싶다. 어차피 10초 정도 얼굴 보는 사이니 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이 편한 분위기가 아이에게 나쁠 건 없겠지.
아이가 가고 나면 밀린 집안일을 하곤 하지만 대부분 내 자유시간을 만끽한다. 아이가 나가자마자 집안정리도 하고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지만 대충 정리하고 빨래를 돌린 후 방으로 숨어버린다. 집안일 같은 건 아이가 있어도 할 수 있잖아. 내 자유시간을 집안일 하는데 다 쓸 순 없지. 대체로 도서관이나 스터디카페에 가기도 하고 산책을 하거나 낮잠을 자기도 한다. 요즘은 책을 읽고 글을 쓰기만 해도 7시간이 어찌나 쏜살같이 지나가는지 놀라울 정도다. 처음 면접교섭을 할 때만 해도 아이가 말을 못 하니 잘 지내는지 밥은 제대로 먹는지 걱정이었다. '오늘 아침 별로 안 먹었는데.. 낮잠도 1시간 이상 재우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와는 데면데면하던 시절이라 뒤늦게 생각나거나 중요한 전달사항이 있으면 카톡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아이는 시간이 자란 만큼 쑥쑥 커서 어느새 챙겨 보내던 기저귀도 필요 없어지고 이제는 말도 잘한다. 그래서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은 아이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내 할 일에 집중한다. 보고 싶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가도 또 올 시간이 다가오면 좀 더 놀고 왔으면 하는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고.
아이는 아직 아빠에 대해서 질문이 없다. 워낙 기억도 못할 어릴 때 별거를 시작해서일까? 매일매일 행복하게 지내는 아이는 굳이 아빠를 찾지는 않는다. 최근 "아빠 무서워, 만나기 싫어" 그러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가슴이 쿵 했다. "왜~? 아빠가 왜 무서워~?" 그랬더니 하는 말.
"수염 있잖아"
....
"수염 있는 사람들은 착해~ 할아버지도 수염 있잖아"
"할아버지는 수염 없어. 착한 사람이야"
이건 편견이다. 전래동화에서 악당들에게는 항상 수염이 나 있다. 아이에게 이런 편견을 심어주다니..
"아빠가 00이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라며 달래 보지만 별로 귀담아듣지 않는다.
항상 고모와 할머니가 함께 만나고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는 분들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의 말에 대해서 별다른 의심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인간성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 역시 남아 있다. 다만 아빠가 인상도 다정하지 않고 무뚝뚝한 편이라 아이에게는 어렵게 느껴졌던 걸까?
가끔 보는 아이한테 다정하게 좀 대해주지!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면접교섭은 엄연한 그와 아이의 시간. 내가 간섭할 자격은 없다. 매일 아빠보고 싶다고 우는 것보단 이게 낫다며 애써 나를 다독인다. 참 보고 싶어해도, 보기 싫어해도 문제다.
신혼집에 있을 때는 아기아빠의 육아참여도가 낮아서, 현재는 한 달에 두 번 밖에 만나지 않아서 아이가 아빠와 친밀감을 쌓을 시간이 물리적으로 많이 부족했다. 나는 아빠와 아이의 만남을 찬성하는 입장이라 그가 원하면 일주일에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더 만나게 할 의향이 있지만 그는 의무적인 두 번이면 족한 듯 한 번도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한 적은 없다. 나 역시 최소한의 의무만 지켜줘도 고맙기 때문에 그 이상을 요구한 적이 없고.
그래도 아들이니 이 관계만 유지되더라도 나중에 크면 아빠와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까,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아이에게는 세상 하나밖에 없는 아빠의 사랑을 느끼고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 나에게는 다시 아이와 2주를 함께할 체력을 보충할 소중한 시간. 세월이 흐르면 많은 게 변하겠지만 이 시간만큼은 오래오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