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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삼 Jan 17. 2024

이혼한 아이아빠와 어린이집 운동회를?

여전히 엄마이고 아빠입니다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가을 운동회를 한다는 소식이다. 사실 6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다. 높은 참석률을 바라시는 원장님이 일찍부터 말씀해 주셨으니까.

빠져나갈 틈 없게 평일이나 낮도 아니고 빨간 날로 예쁘게도 잡으셨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당연히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6개월간 어린이집 학부모들과의 안면이 터지자 고민이 시작됐다.

혼자만의 열등감과 상상 속에 빠져있던 나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운동회에 참석하는 것은 곧 이혼했다는 이름표를 달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진실을 말하지 못해서 불편했는데, 그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게 솔직한 내 속마음이었나 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불참한다고 말씀드렸다. 어차피 휴일에 놀러 가는 가족들도 많잖아. 설마 다 오겠어?

할머니 할아버지는 6개월 전부터 운동회가 있다고 드린 말씀에 그날 스케줄까지 조정해 놨다며 아쉬워하셨지만 내 솔직한 심정을 듣고는 이해해 주셨다.

다음날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어머니~ 00이 운동회 불참하신다고 하셔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 다들 아빠랑 올 거 같아서 좀 불편해서요"

"어머니~ 안 그래도 참석수요 조사해 보니 아빠랑 안 오는 집도 많더라고요 ~ 할머니 할아버지랑만 오는 친구들도 많고~ 너무 재밌을 거 같은데 다시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

"..."

어린이집 운동회가 이렇게 중요한 거였나..? 어차피 아이는 기억도 못할 거라고 쉽게 생각했던 내 예상을 깨고 선생님의 설득이 들어올 줄이야.

이미 주변사람들에게도 안 간다고 얘기했고 나도 굳이 불편한 마음으로 운동회를 즐기지 못할 거 같아 죄송하지만 불참하겠다고 다시 한번 말씀드렸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며칠 뒤 또 전화가 오셨다.

"어머니~ 운동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빠 안 오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리고 누구랑 오는지 상관없게 모두 어울려 놀 수 있는 재미있는 운동회예요"

"... 생각해 볼게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세요 ~블라블라~"


전화를 끊고 나니 심란하다. 내 인생에 아무것도 아닌 이벤트라고 생각했던 어린이집 운동회가 한순간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물론 아이의 어린이집 운동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아직 운동회의 개념을 잘 모를 나이니 내가 어디든 데려가서 신나게 놀아주면 그게 운동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날며칠을 고민하다가 이혼한 친구가 있는 톡방에 물어봤다.

나 :지금 이러이러한 상황인데 너무 고민이네.. 너는 운동회 어떻게 했어?

A :야. 주변 사람들 그거 신경 쓰지 마. 그 사람들이 너한테 돈을 주니 뭘 주니? 그냥 당당하게 가. 나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갔어.

아.. 그렇구나. 역시 선배는 다르다. 당당한 마인드가 멋지다.

B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 한다더니 자기도 옛날엔 그렇게 고민해 놓고선. 심지어 너는 네가 안 가고 할머니 할아버지만 갔잖아~

이런.. A에게 속을뻔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내가 바보 같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할 뻔했다.




이런 고민을 한 때가 전 시아버지 병문안을 갈 때쯤이었다.

병원에서 만난 그에게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9월 28일에 시간 돼?"

"왜?"

"그날 아이 어린이집에서 운동회를 하는데 참석 가능한가 싶어서."

"잠깐 근무 스케줄 좀 볼게"

교대근무를 하는 그의 직종 특성이다.

빠르게 핸드폰을 확인해 보더니 "9월 28일? 가능하네"라는 답을 해준다.

"그럼 그날 10시. 장소는 카톡으로 보내줄게"

"응"


어이없고 간단하게 운동회 참석제안이 수락되었다.




당일 운동회 장소는 어린이집과 아주 멀리 떨어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운동회장소 앞에서 만난다. 운동회 드레스코드도 잘 지켜왔군. 어색한 끄덕임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입장한다. 맙소사. 거의 다 왔잖아? 같은 반 친구 엄마들도 만난다. 자리에 착석하면서 빠르게 스캔하니 (아빠인지 삼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안온 집은 한 팀도 없다. 평소에도 아빠들이 하원을 시키거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육아비중이 높은 분위기라 대충 짐작했던 일이다. 왜 선생님은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라며 살짝 원망하는 마음도 잠시 들었다. 그와는 운동회가 시작하기 전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 그는 시아버지의 장례식에 대해 나는 아이의 근황에 대해 정중하고 예의를 지킨 말투로.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불편한 건 내 쪽이 아니라 아이 쪽인듯하다. 늘 낯선 상황에 놓이면 그렇듯 내 품을 파고든다. 아이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있는 모습이 반갑지도 않고 어색하겠지? 아이에게 미안한 단 한 가지다. 하지만 오늘은 미안한 마음 그런 거 없이 신나게만 놀다 가련다. 다행히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프로그램들로 나는 운동회에 매우 몰입했다. 굳이 대화를 할 만한 공백도 없었기에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다른 가족들과 다른 게 있다면 우리는 가족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점. 마지막 사진타임에서 부부싸움이라도 하고 온 마냥 어색하게 앉아있었던걸 제외하면 나름 괜찮은 운동회였다고 생각한다.




그와 함께한 가족운동회가 끝나고 나서 놀라울 정도로 아무 감흥도 없었다. 애틋한 반가움이나 추억여행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이제 그와는 완전히 사무적인 관계가 되었다. 편하다. 내 아이의 아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이 관계에 고마움밖에 느낄 게 없어 마음이 편하다. A 친구는 미쳤냐고, 아이아빠랑 왜 운동회를 같이 가냐고 했다. 누군가는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아이 운동회니까 아이 엄마랑, 아이 아빠가 가는 거지. 이혼을 한다고 부모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인걸. 그래도 내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가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귀가했다. 역시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올 때 마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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