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참 불공평해 보인다.
좋은 집안 배경과 뛰어난 머리 심지어 준수한 외모까지
별다른 노력 없이 양손 가득 쥐고 태어난 이들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신은 우리에게 불공평한 삶을 허락했을까?
출발선이 다른 인생, 극복할 수 없는 삶의 무게
이 모든 문제를 아시고 능히 바꾸실 수 있는 전능한 신이 왜 이런 불공평한 삶을 간과하실까?
어떤 이유도, 어떤 변명도 태어나면서부터 두 어깨에 짊어진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의 간절한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될 때,
공평한 사랑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며 이룬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진 삶일 때,
나에게는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소망하던 하루였음을 알게 됐을 때,
뛰어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세상의 높은 벽과 그 벽 앞에서 발버둥 치는 나의 무의미한 몸짓에
인생의 허무함을 느낄 때가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의 기준이며 제도이고 인간의 욕심이 낳은 산물이라고
일정 부분 동의하기도 한다. 신이 불공평한 사랑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행복의 가치, 아름다움의 척도, 명예의 기준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질문을 쉽게 거둘 수는 없다.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은 불공평한 삶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장애와 같은 인간의 근본적 불행에 마주한 사람들을 인간의 욕심이 만든 불공평한 삶이라 치부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기준이라 할지라도 그 불공평한 삶으로 견뎌야 하는 고통과 삶의 무게를 신이 아신다면 왜 이 삶의 기준과 가치를 간과하실까라는 도돌이표 같은 질문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공평한 사랑, 완전하지 않은 것 같은 사랑에 대한 의구심이 가득할 때가 있다.
불공평해 보이는 삶, 그 삶의 무게는
내게 하나님을 찾고 그의 사랑을 경험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다 이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에서 누가 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삶인가
쉽게 정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삶이 나에겐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이유가 되고 다른 이에겐 이미 주어진 것들이
나에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눈물의 고백이 된다면 모든 것이 당연한 삶의 사람과 삶의 한순간 한순간이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하는 이유가 되는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렵다.
우리는 누구나 솔로몬을 꿈꾼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세상의 모든 영광도 함께 누리는 그런 삶
세상 모든 핍박과 멸시를 당했던 사도바울보다 이왕이면 세상의 영광을 누리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한 솔로몬의 고백과 죽임 당하는 순간조차 그리스도로 기쁨에 충만했던 사도바울을 볼 때 어떤 삶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삶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어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는 인생보다
너무도 연약하여 혼자 감당할 수 없어 하나님의 도움과 함께하심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인 인생
그런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하는 삶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아시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참 사랑하시네
내가 나를 버리고 싶을 때, 나를 하나님이 잡으시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나를 참아 주시네
내가 나를 부끄러워할 때, 하나님이 나를 세워 회복하시네
내가 나를 어찌할 줄 모를 때,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네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나를, 하나님이 품어 주시네
- 송명희 시인의 '내가 나를' -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 장애라는 무거운 삶의 무게가 주어졌지만
남이 가진 것은 없으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신 하나님은 공평하다 노래하는 송명희 시인의 고백처럼
세상이 불공평하다 느껴질 때, 남에겐 당연한 일상이 나에겐 너무 큰 짊이라 여겨질 때
어쩌면 그 순간이 남이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큰 기쁨을 누리는 소중한 순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