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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로 Jul 11. 2017

불공평한 사랑_그 두 번째 이야기

오래전 병원에 잠시 입원하신 어머니 옆을 지키고 있을 때, 이곳저곳 병실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전도하고 기도해주시는 한 목사님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은 모든 환자들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했다.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영접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은 사람과 하루를 믿은 사람에게
동일한 구원이 주워지는 것이 공평한 사랑일까?


모태신앙으로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나로서는 너무나 익숙한 멘트 중 하나였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태어날 때부터 30년 가까이, 어쩌면 내 평생 80년 가까운 시간을

신앙생활을 하게되는 나와 하나님을 믿은 지 채 하루가 되지 않은 병석에 누워있는

저분이 동일한 구원을 받는 것이 공평할까?


왠지 모를 씁쓸함, 서운함, 억움함들이 밀려왔다.

대학시절 한 선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충분히 놀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교회에 갈래, 젊을 때 즐기지 못하는 건 아깝잖아"

언제 믿어도 동일한 구원이 주워진다면 누가 들어도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크리스천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즐거움과 거리를 두어야 하고, 누리지 말아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참아야 할 것, 감내해야 할 것들이 많은 삶을 덤덤히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취하는 것보다 내어주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며,

내 것을 챙기기보다 다른 이의 어려움에 마음을 써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들에게
불공평한 사랑에 대한 불평은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삶의 쾌락과 물질적 풍요가 우선시 되는 세상 문화 속에서 나 홀로 그 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런 삶을 덤덤히 살아온 사람과 세상 즐거움을 다 누리다 눈을 감기 전 하나님을 믿는다 고백한

사람이 동일하게 구원을 받는다면 나로서는 불공평한 사랑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
이런 불공평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와 관련해 성경에 '포도원 품꾼' 이야기가 나온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시장에서 일꾼 몇 명을 데려와 일을 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다.
잠시 후 3시에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 그들도
포도원으로 데려와 일을 시켰다. 6시에도, 9시에도 그리고 하루 일과를 한 시간 남긴 
11시에도 주인은 시장에 나가 아직도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데려와 일을 시켰다.
주인은 하루의 일과를 마친 일꾼들에게 품삯을 나눠주는데 이른 아침에 온 일꾼과
마지막 11시에 일을 시작해 한시간만 일한 일꾼에게 동일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급한다.
이에 이른 아침부터 일했던 일꾼들이 주인에게 원망을 하며 왜 동일한 품삯을 주는지 따져 묻는다.
그러자 주인은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은 한 데나리온이지 않느냐,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너와 같은 값은 주는 것이 내 뜻이라며 돌려보낸다. (마태복음 20:8~14)


참 불공평 사랑이다. 내가 이른 아침부터 일했던 일꾼이라도 불공평한 사랑에 대해 

똑같이 불만을 토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포도원 품꾼 이야기에서 생각해봐야 할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은혜 입은 내가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크기를 결정할 권리가 있을까?


첫째, 다른 이에게 주어지는 품삯의 크기를 결정할 권리가 나에게 있는가?

주인이 아침에 일꾼들에게 약속한 품삯은 한 데나리온, 그 시대 하루 노동의 대가로 충분한 금액이었다.

그때 일꾼은 기뻤을 것이다. 오늘도 일을 구했고 그 대가도 충분하게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행의 시작은 동일한 노동을 하지 않은 일꾼이 동일한 대가를 받았을 때 일어난다.

하지만 주인의 말을 반박할 수 없다. 난 나의 노동의 대가를 충분히 받았고 늦게 온 사람에게 동일한

대가를 주는 것은 온전히 그것을 주는 주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주인의 권리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불공평한 사랑에 대한 씁쓸한 기분을 쉽게 거둘 수는 없다.

행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고 볼멘소리를 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늦게 은혜를 입은 사람의 삶을 
우린 더 행복한 삶이었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둘째, 주인은 누구에게 더 행복한 하루를 선물했을까?

이른 아침부터 주인의 눈에 띄어 일을 구한 사람들은 매우 기뻤을 것이다. 오늘의 일을 구했기 때문이다.
3시, 6시, 심지어 11시에도 아직 장터에 일꾼들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아 공급이 수요보다 많았던

인력시장에서 아침 일찍 일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큰 행복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하루의 품삯을 받아 가족들의 저녁거리를 사갈 수 있다는 기쁨으로 하루의 고된 노동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하루 일과가 끝나기 한 시간 전까지 일을 구하지 못했던 일꾼들은 하루 종일 초조함과 불안함으로

괴롭고 지루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오늘 일을 구하지 못하면 굶어야 할 식구들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했을지도 모른다. 렘브란트의 '포도원의 품꾼들'(1937)이라는 작품을 보면 늦게 온 일꾼들이

미안함과 감사함에 일과가 끝난 후에도 일을 손에 놓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과연 오늘 하루 누가 더 큰 주인의 은혜를 입은 일꾼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내 삶 속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하루와 세상의 욕심과 물질로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의 허전함을 끓어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의 삶이 더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일찍 은혜받은 사람인지,
늦게 은혜받은 사람인지 명확히 대답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라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모든 논쟁은 내가 이른 아침에 온 일꾼이라는 전제가 성립된 후에 시작될 수 있다.

과연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일까?라는 질문에 명확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태신앙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봉사를 했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교회를 다녔다는 이유로

나 스스로를 아침 일찍 일한 일꾼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끔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도바울을 볼 때, 성경 속 오래된 인물을 찾을 필요도 없이

하나님을 목숨과도 바꾸지 않았던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을 볼 때 과연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어쩌면 나는 불공평해 보이는 이 사랑에 가장 큰 수혜자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공평해 보이는 사랑, 어쩌면 가장 넓은 사랑이자
너무 큰 사랑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불공평해 보이는 사랑, 어쩌면 가장 넓은 사랑이자

아주 작은 나까지 구원하길 원하시는 그분의 너무 큰 사랑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 사랑이 가끔은 불공평해 보이는 건 나의 이기적인 시선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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