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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로 Dec 20. 2017

불공평한 사랑_그 마지막 이야기

오랜 시간을 고민해왔다.
마치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적 모순처럼

그분의 불공평한 사랑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불공평한 사랑에 대한 이유를 찾고 있는 나에게
더 큰 사랑으로 위로하시는 그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큰 뜻이라, 그것이 믿음이라 둘러대며 불공평한 사랑의 현실을 묻어두길 원했다.


하지만 들을 수 있었다. 이미 말씀하고 계신 그분의 불공평한 사랑의 이유를

볼 수 있었다. 사랑에 갈급해하는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불공평해 보이는 사랑에 고통하는 나를  큰 사랑으로 위로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성경에 '달란트 비유'라 불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이 외출하며 세명의 종에게 각각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눠주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를 하여 두배씩 남겼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묻어두었다.
주인이 돌아와 종들이 가져온 것을 보고 두배를 남긴 두 종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하며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며 칭찬하였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맡겼던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꾸짖으며 한 달란트를 빼앗고 내어 쫓았다. (마태복음 25:14~30)


그동안 이 비유 속에서 두배를 남긴 두 종과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온 종의 차이에만 주목해왔다.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성실하게 사용했을 때 칭찬하시고 더 큰 상급을 주시는 그분에 집중한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첫째, 비유를 통해 성실한 종과 게으른 종에 대한 차이를 말씀하고 싶었다면

왜 착하고 충성되다 칭찬받은 종을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으로 나눠 언급하셨을까?

둘째, 동일하게 충성된 종이었던 두 종에게 왜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라는 다른 시작점을 허락하셨을까?

서로 다른 출발선에 서게 한 주인을 우리는 공평하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의 목적성이 그분의 기쁨이 되는 것에 있다면 
출발선이 어디였는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두 질문에 대한 답에 앞서 나의 삶의 목적성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나의 삶의 목적이 몇 달란트를 벌었는가에 있는지, 아니면 주인의 기쁨이 되는 것에 있는지를 말이다.


두 종은 모두 성실하게 장사하였지만 다른 시작점에서 출발하였기에 결과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과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똑같은 칭찬과 상을 내리는 주인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주인이 두 종에게 내린 칭찬과 축복의 말이 단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나의 삶의 목적이 그분의 기쁨이 되는 것에 있다면 내가 어떤 시작점에서 출발하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리에서 그분에게 기쁨이 되었다면 어떤 출발선을 허락했다 할지도

나의 삶의 목적을 동일하게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칭했던 세례요한,
그분은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그를 향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 6개월 전에 태어나 그분이 가실 길을 예비했던 세례요한,

그는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칭했다.

그는 헤로디아의 철없는 십대 어린 딸의 손에 들린 소반 위에 머리가 얹혀 나와 연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가장 비극적이고 치욕적인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에게는 베드로처럼 위대한 표적과 기적을 행하는 능력도

엘리야처럼 죽음조차 비껴나가 하늘로 승천하는 영광스러운 마지막 모습도

모세처럼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의 모습도 허락되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 잠시 어둠을 밝히다 사라지는 촛불처럼, 바람에 스쳐 지나가는 광야 속 소리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길가에 들풀이 되어 그렇게 잠시 세상에 머물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그를 두고 그분은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 말씀하셨던 것은

그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작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 앞에서도 내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나의 삶의 목적이 그분의 기쁨이 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삶의 무게가 버거울지라도, 오르고 또 올라도 닿을 수 없는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하고 있을지라도 

그분의 사랑이 충분하다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통해 그분이 행하실 일에 내 삶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유일한 목적성이 그분의 영광이 되는 자리에 서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던 세례요한의 고백처럼

그 자리가 때로는 세상에서 영광스럽지 않은 자리, 비루하고 남루한 자리,

치욕스러운 자리,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자리라 할지라도 그분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그 길을 걷는 일이 나에게는 기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그분의 사랑이 공평하다 말할 수 있는 이유
어쩌면 그분과 함께하는 삶 속에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이미 경험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분의 사랑이 불공평하다 느껴졌던 이유는

그분을 통해 내가 어떤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에 집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내가 어떠한 자리에 서있어야 하는지에 집중한다면

그분의 넘치는 사랑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그분의 사랑이 공평하다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
어쩌면 나의 삶의 목적이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일지도
그분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그분의 넓고 끝없는 사랑을 이미 경험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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