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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르네스토 Oct 12. 2021

축구계의 스티브잡스

요한 크루이프를 만나다. 하지만, 이제 없다.

요한 크루이프 감독은 네덜란드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지만, 정작 스페인의 FC바르셀로나 클럽에서 전설이 되었다. 그는 선수로, 감독으로, 그리고 클럽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세계의 한 획을 그었다. FC바르셀로나에서 그의 지휘를 받은 선수들이 이제는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드림팀은 유럽을 호령하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요한 크루이프 감독 시절.. 드림팀 선수들

FC바르셀로나는 그의 업적을 그리며 2군 및 여자 1군 팀의 경기장을 새로 건축하고, 그의 이름을 넣은 구장까지 만들었다.

 

FC바르셀로나 요한 크루이프 구장

평생 잊지 못할 그와의 만남은 우연이 만들어준 선물이다. 그리고 만남 3년 후, 그는 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의 인터뷰를 통역한 일 자체도 영광이지만, 그와 직접 대화하며 축구의 열정과 축구의 의미를 새삼 되새긴 것이 더욱 큰 의미로 남는다. 그의 육성이 담긴 자료를 여기에 함께 남긴다.

 

요한 크루이프!

 

에스파뇰 트라이아웃을 진행하던 와중에 모 언론 기자의 요청으로 어렵게 어렵게 요한 크루이프와 연이 닿았다. 카탈루냐 성인대표팀 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그는 크리스마스 및 연말 휴식기를 맞이하여 자신의 팀과 해외 팀의 친선경기 공식 인터뷰 자리에서 30여 분간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카탈루냐 대표팀의 공식 친선경기를 위해 스페인의 대표 맥주회사인 담(Damm)이 후원했고, 담의 홍보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크루이프는 여러 질문에 친절하게 답변하고 자신의 의견도 피력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발언은 크루이프 본인이 생각하는 축구..... 그것은 바로 기술이라는 점이다. 선수의 기술이 팀의 기술이고,  그 기술이 감독의 전술과 클럽의 운영에 막대한 영향을 주며,  그것이 없으면 즐거운 축구를 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축구는 기술이다. 더 나아가 인생이 기술이다.

 

노력하여 기술을 연마하고 빛이 나도록 하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이고 소속된 단체와도 같이할 수 없다. 비단 축구에만 적용되는 원칙은 아니리라.

 

다시 한번 요한 크루이프를 기리며….



요한 크루이프와의 인터뷰(음성파일 첨부) - 스페인어 ( 스페인에서 생활한 크루이프는 스페인에 능통)




요한 크루이프 스승.  라우레아노 루이스씨가 그의 제자 요한 크루이프를 그리면서 쓴 글 <참조,  글 라우레아노 루이스,  번역: 필자 >


요한 크루이프에게 경의를 표한다


헨드릭 요하네스 크루이프는 1947년  4월 25일 암스테르담의 아약스 클럽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무누스는 과일장사였고, 어머니 넬은 아약스 클럽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 크루이프는 60세 생일을 맞이하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은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10세에 벤자민 카테고리에 들어갔는데 300명의 선수 중에서 선택되었다. 항상 경기장에서 축구공과 함께 지냈으며 훈련은 혼자 혹은 동료들과 하였다. 물론, 경우에 따라 프로들과 경기를 같이하기도 했다. 그의 자질과 지성에 영국 감독인 빅 부킹한이 놀라면서 17세에 아약스 클럽에 데뷔를 했다. 곧 기대에 미치게 되었다. 뛰어난 실력은 팬들을 반향을 일으켜 국가대표선수로 발탁을 희망했지만 19세까지는 실현되지 않았고, 1966년 9월 7일에 헝가리를 상대로 대표선수로 데뷔를 하여 2골을 넣었다.  오렌지팀의 선수로 48경기를 치르면서 33골을 넣었다. 그의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74년 월드컵 때이다. 물론, 독일이 우승을 했지만 네덜란드팀의 놀랄만한 경기력과 화려한 축구 그리고 전 세계의 팬들을 놀라게 했다. 이때, 자연스럽게 크루이프가 훌륭한 선수로 인지되는 순간이었다.


황금볼상은 71,73,74년 취득했지만 기념비적인 해는 1972년도였다. 아약스는 리그, 컵, 유럽 컵, 수페르 컵, 인터콘티넨탈 컵을 휩쓸었다. 오늘날까지 누구도 이러한 업적을 달성한 선수는 없다. 1973년 FC바르셀로나에 오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경외심을 갖게 했다. 바르셀로나는 이 당시 가장 기억될만한 경기와 잊지 못할 위대한 경기를 통한 챔피언을 차지하게 되었다.


1978년 바르셀로나에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카로 이적을 했다. 그리고, 1981년에는 몇 개월 동안 레반 떼에서 뛰었고, 1982년 아약스 클럽으로 돌아가서 2년 연속 리그 챔피언을 이루어내었다. 그 당시, 단장은 크루이프를 우리 클럽에서 은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크루이프는 이에 답변을 하듯이 최종 결승전 상대팀 페이 노르트 팀을 꺾고 리그와 컵대회를 휩쓸었다. 3년 동안 네덜란드의 가장 훌륭한 선수가 되었다. 크루이프는 37세에 은퇴를 했고 화려하고 재능 있고, 영리한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운영. 그의 경악할 만한 움직임은 단순했다.



20세기를 대표한 선수들은 누구인가 토론을 한다면 아마 디 스테파뇨, 펠레, 크루이프, 마라도나 등이 언급될 것이다. 물론, 부스카스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최고의 선수는 누구란 말인가?


펠레와 마라도나는 개인플레이 특성을 보이는 면에서 비슷하다면 디 스테파뇨와 크루이프는 축구를 이해력 등이 비슷하고 어떤 미팅에서도 잡음이 많지 않은 선수들이었다. 즉, 쉼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는데 동료 선수들, 심판, 상대방의 선수들, 관객 등 다양하다. 아울러, 두 명의 선수 특징 중 승리에 대한 열정과 성취도는 굉장히 비슷하다. 예컨대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디 스테파뇨가 더 다양한 옵션에서 유익한 선수이며 강직한 면이 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축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최고의 선수가 될 것이다. 시야와 스피드를 충분히 활용하지, 결코 여러 가지를 사용 하지 않는다. 달변가 코바츠 감독은 아약스 클럽을 떠날대 그에게 액자를 선물했는데 당시 표현하길 전술에 있어 세계에서 최고의 선술이라고. FIFA에서도 극찬하길 20세기 최고의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


지도자 크루이프


1984년 아약스는 축구 지도자로 선임을 했고 그는 최상의 상태에 있는 3명의 수비수를 활용한 클럽을 구성했다. 1985년 1부 팀으로 보냈고, 2 시즌을 네덜란드 컵대회, 인터콘티넨탈 레코파에서 레이프치히의 로코모티브를 이겼다.( 반 바스텐의 골로 승리, 1:0 )


1988년 5월 바르셀로나의 뉴녜스구단주는 좋은 선수들이 떠나고, 위기의 실절을 겪고 있기에 감독의 영입이 필요한 때였기에 크루이프를 영입했다. 1990년 스페인 리그, 스페인 컵대회를 휩쓸었다. 이러한 승리는 파면될뻔한 것을 모면하게 했다. 그리고는 연속적을 4번의 리그와 유럽컵을 들어 올리면서 바르셀로나의 드림팀이라 불리던 시절을 만들었다.


최고의 전술가는 선수로 성장하여 최고의 지도자로 변신을 거듭한 것이다. 아마, 최고라는 것이 이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몇 명의 지도자들만이 요한처럼 전적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타이틀을 떠나서 몇 가지 점에서 훌륭한 점을 언급한다.:


1. 세계에 널리 퍼져있던 축구 스타일의 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수비수 한 명을 빼고 3명의 공격수를 두는 파격적인 시스템을 구사했는데 당시 지도자들은 걱정을 하면서 잘 사용하지 않던 수법이었다. 특히, 윙을 강화하면서 공격적인 축구의 가장 본보기적인 역할을 했다: 넓은 경기장 전체를 핵심을 공격에 두고 전개를 했던 것이다. 팀은 쉼 없이 인내를 하면서 공격을 하였는데 마치, 게임에 악세 레이더를 단 것 같았으며 상대방 문전에서 경기를 할 정도였다. 이러한 모습에 꿈의 팀이라고 제스처를 낳았던 것이다.


2. 오늘날 스페인이 축구-축구를 외치면서 축구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었다. 즉, 스페인에 지도자로 왔을 때는 여러모로 피폐된 축구였다. 1부 리그에서는 후반전에 우승이 예상되면  수비에 치중하는 감독들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무승부) 따라서, 그들은 선수들에게 창조적인 축구를 시도하지 않게 하고, 자신의 진영에서 상대방을 기다리기 위해 공을 멀리 차버리곤 했다. 따라서, 역습에 대한 고통 가능성을 아예 배제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게임은 비굴하고 기초적인 축구였으며 그나마 유일하게 크루이프만이 좋은 결과를 수비에 치우치지 않게 진행함으로 해서 후반전까지 우위를 점하여 승리를 보증했던 것이다. 이러한 축구의 좋지 않은 단점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크루이프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낸다.


바르셀로나에서 선수와 감독을 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이끌었다. 확실히, 클럽에서 가장 책임감 있고 전술적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클럽이 언제 가는 동상을 세워서 그의 업적을 기리게 될 것이다. 아니면, 고향에서라도 만들 지게 될 것이다. 많은 팬들과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선수들도 좋아하는 크루이프 선수를 누녜스 구단주는 다시 한번 그와 작별을 고려하던 때, 구단주 기자 친구들은 이렇게 조언하기도 했다. 누녜스가 그를 받아들일지, 버릴지는 아마 누녜스의 성공과 직결될 것이다. 누녜스는 그를 버리지 않았고, 크루이프는 그의 천재성과 진실 어린 지도자로서 거듭났다. 선수와 지도자로서 성공을 했다. 축구-축구를 더욱 사랑하게 했고, 황홀경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아직도 그에 대한 얘기는 이어진다. 요한, 다시 한번 감사의 찬사를 보낸다.



14번

크루이프가 아약스에서 데뷔할 당시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을 당해서 몇 경기를 출정할 수 없었다. 회복 기미가 있을 다시 팀에서는 후보선수로 등록되어있었다. 일반적으로 축구에서 주전 선수들에게는 1~11번까지 번호가 주어지는데 크루이프는 14번이 주어졌다.  아약스 클럽이 1:0으로 지고 있는 시점에서 휴식시간에 감독은 요한을 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교체는 매우 적합했다: 즉, 여러 골을 넣었고,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결국에는 6:1로 역전승했다. 이때부터 크루이프는 14번과 함께 했다 하지만 이 번호는 주전 선수들 쓰던 번호는 아니었던 것이다.


요즘, 아약스 클럽의 관련자들은 그의 60세 생일을 맞이하여 신화적인 존재였던 크루이프 선수를 기리기 위해 14번 유니폼을 은퇴시키기로 결정했다.  요한 다케 단장은 만찬장에서 아약스 클럽을 세계적인 명성 있는 클럽으로 발돋움하게 한 14번의 유니폼을 감사의 마음으로 크루이프에게 전달하면서 이 번호는 영원히 주전 선수 당신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Crak이라 불리는 크루이프는 매우 현실적이었다. 그의 답변은 그러한 결정에 감사를 하지만 14번의 중요함을 알기는 하지만 은퇴를 결정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건대 어느 순간 또 더 나은 훌륭한 선수가 배출되어 그에게 사용되길 기대합니다.라고 했다.  정말이지 존경받을 만한 크루이프 선수이다.



그가 만들어낸 명언들

축구에 대한 이해력이 굉장히 폭넓은 크루이프는 논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축구에 대한 적절한 표현방식을 만들었다. 아래와 같이 나열한다.


1. 거리에서 축구를 배운다.  작은 공간을 활용한 기술 향상에 도움을 주고, 적은 수의 선수를 활용할 줄 알게 됨으로써 경기에서의 향상을 가져오게 한다. 나의 결기력에서 선호하는 것은 처음에는 벽에다가 슈팅을 하는 것이고 빠른 스피드로 튕겨 나온 공을 컨트롤하여 다시 차는 것이다.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2. 항상 공격을 매력적인 방법을 통하여 훌륭한 게임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스펙터클한 경기를 해야 한다.


3. 경기는 기초적이다, 쉽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다. 40미터의 패스를 하기 위해서 20명이 충분한가?


4. 무엇이 좋은 패스인지 나쁜 패스인지 따지는 것보다 뒤로 패스를 하는 경기는 최악이다.


5. 나의 공격수는 단지 15미터만 달려야만 한다.


6.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은 스페인 축구를 유럽에 알리고, 많은 우승을 했던 최고의 시절이었다.


7. 바르셀로나 시절 유럽컵에서 우승했다( 코에만의 골로 삼도리아에게 1:0) 그리고, 선수들에게 미팅 자리에서 말을 했다. 경기장으로 나가라 그리고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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