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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othing Nov 04. 2022

옥토끼와 비닐봉지

초단편 소설

단어 제시 [ 달빛, 봉투, 무덤 ]


월광이 뽀얗게 쏟아지는 어느 날 밤. 초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곳에 무덤 하나가 외로이 솟아있으니 심사가 울울하고 심란하다. 소슬한 무덤가에서 비틀거리던 재민이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곡을 했다. 엉,엉. 어찌 먼저 갔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먼저 가. 엉,엉. 재민은 초록색 병에 담겨있는 투명한 소주를 꿀떡꿀떡 목구멍으로 넘겼다. 입가에 흐르는 침인지, 소주인지 모르는 그것을 소매로 대강 훔치고 무덤에 소주를 뿌렸다. 아휴. 아휴. 무덤에 흩뿌려지는 소주들에 깊은 한숨도 같이 내려앉는다.


재민은 무덤 옆에 털썩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구나. 내 간장은 이렇게 다 녹아버릴 것 같은데,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을 한탄해도 나아지지가 않는데 보름달은 참 밝기만 하구나. 괜스레 울화가 치밀어 재민은 달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거, 이봐요! 혼자만 산단 말입니까? 밝기 좀 줄이시오! 눈이 부셔서 잠을 잘 수가 없잖소! 누워서 열변을 토해내는 통에, 재민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침이 죄 본인의 얼굴에 뿌려졌다. 에이 씨. 마른 손으로 얼굴을 벅벅 닦은 재민은 무덤을 향해 모로 누웠다. 팔을 가슴에 안고 무릎을 굽혀 최대한 웅크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저씨. 아저씨”   


어깨를 마구 흔들어대는 통에 재민이 눈을 떴다. 골이 깨질 듯했지만 눈앞의 광경이 더 가관이었다. 잿빛 털을 온몸에 휘두른 거대한 토끼가 저를 향해 꿈뻑꿈뻑 눈을 감았다 뜨며 어깨를 흔들고, 볼을 잡아 늘리고 있었다.   


“어, 아저씨 일어났네. 남의 영업점에 들이닥쳐서 뭐 하는 거 에요. 증말”   


“아니, 솔까 원하는 게 있으면 달빛 아래 물 한 사발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이 보우하사 신묘한 약을 내려주시어 가련한 목숨을 살려주시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며 빌어야 정상 아니야?”   


“누가 아니라니. 저 아저씨는 드르렁, 드르렁 우렁차게 코만 골다가 들어왔지. 어휴. 가끔 달의 정기가 너무 센 날은 저딴 불청객이 들어온다니까는”   


잿빛 털의 토끼들은 가운데에 절구를 놓고 커다란 방망이로 절구를 퍽퍽 찧어대며 볼멘소리를 해댔다. 한 토끼는 대 놓고 흉흉한 눈빛으로 째려보며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기까지 했다. 크고 기다란 귀가 하늘 높이 바짝 올라가 있는 모습이 용맹 무쌍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저 커다란 앞니로 사람의 생살을 찢어 발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저씨가 원하는 게 뭔데? 속으로 빌었으니까 여기 와 있는 거 아냐. 빨리 말하고 꺼져”   


재민은 바닥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돈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커다란 눈알을 드르륵 굴려 두 토끼를 쳐다봤다.   


“말… 말하면 이루어지는 겁…니까?”   


“그! 렇 ! 데! 두! 옥토끼 못 들어봤어? 선단을 만드는 달에 사는 토끼! 형씨가 지금 거기 들어와 있다고. 누가 아픈데? 자식이야, 처야, 누이야, 노모야? 누구를 무병장수 시켜주면 되는데?"   


“그… 그게. 이미 죽었…. 는데.. 살릴 수….. 있나?"   


“뭐???"   


두 토끼가 동시에 재민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토끼들의 축 늘어진 커다란 두 귀가 토끼들의 눈앞에 자리했다.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양,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는 양.  

 

“하… 한, 백 년 만인가?”   


“그때는…. 반은 실패하긴 했지… 전 날에 놀러 온 늑대 놈의 털이 잘못 들어가서….”  

 

“신성한 작업실에 자꾸 짐승들 들이지 말랬지!”   


“아니, 그럼 연애는 언제 한단 말이야? 나도 즐길 건 즐겨야지!”   


큼, 큼. 재민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살릴 수 있다는 말이야, 없다는 말이야? 식은땀이 나는 이마를 손으로 훔쳐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그래서... 살았소?"   


“쟤가 데려온 늑대 털이 잘 못 들어가서 늑대 인간이 되었어. 그래도 불로 장생했으니까 된 거 아냐?”

  

“말미에 화형 당하긴 했……”   


“어쨌든 만들어 주면 되는 거지? 오늘은 들어갈 늑대 털도 없어. 쟤 늑대랑 깨졌거든”   


토끼들은 재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절구에 반짝반짝 빛이 나는 은색 가루를 뿌리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빨간 덩어리도 넣고, 노란색의 투명한 물을 졸졸 흘려 넣고, 누구 것인지 모르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넣고 절구를 찧기 시작 했다. 토끼들의 손놀림이 빨라질수록, 절구를 찧는 토끼들이 하늘 높이 점프를 했다. 덩덕쿵 쿵덕! 덩덕쿵 쿵덕! 어디선가 장구와 북소리가 마구 울려 퍼졌다. 한참을 신명 나게 손과, 몸을 놀리던 토끼들이 헉헉 거리며 멈추었다.   


“아, 그런데 이걸 달에서 가지고 나가려면 빛이 한 점 들지 않는 곳에 가지고 가야 하는데”

   

“그건 저 아저씨가 알아서 하겠지. 포장까지 해줘야 해?”   


“아저씨. 이거 빛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효력이 사라져. 아저씨가 입에 머금고 가든, 똥꼬에 넣고 가든 알아서 해”   


재민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소주를 담아 왔던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 곱게 펴서 토끼들이게 들이밀었다.

  

“아니, 이… 이것은!!”   


“썩는데 500년이나 걸리고 이산화 탄소를 배출해 우리의 터전을 위협한다는 그 비닐봉지가 맞지?”   


“정말 흉물스럽군. 이런 비닐봉지를 자꾸 쓰면 언젠간 옥토끼도 사라져 신묘한 힘을 잃을 수도 있어. 이건 압수야!”   


“원래 달에 입성하는 인간들은, 사연이 기구하고 간절하여 아무런 대가 없이 들어주는데…. 아저씨는 얻어걸린 것이니 죽을 때까지 비닐봉지를 쓰지 않는 조건을 내걸어야겠어! 비닐봉지를 쓰는 즉시 불로장생을 얻은 사람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리니...............”   


토끼들은 재민의 이마를 툭 쳐 주문을 걸고, 고약한 냄새가 풀풀 나는 환을 재민의 입속에 처넣었다. 입을 절대 벌리면 안 돼. 그럼 약의 효과는 사라지는 거야. 재민은 토악질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덧 산새가 푸드덕 거리며 날갯짓을 하고 꽤액꽤액 울어대는 짙푸른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재민은 흠칫 몸을 떨며 잠에서 깼다. 모두 꿈이었나.. 하며 비몽사몽 할 새도 없이 입 속에 썩은 내가 느껴졌다. 재민은 벌떡 일어나 무덤을 마구 파헤쳤다. 입에서 침이 흥건하여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잇새로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손톱이 돌멩이에 부딪혀 피가 흐르고 통증이 느껴졌지만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정식 장례를 치르지 않았기에 봉하지 않은 나무관을 열어젖히고 차갑게 식은 시체에 입을 맞춰 약을 흘려보냈다.   


옥토끼의 전설은 사실이었다. 재민은 다시 살아난 반려와 아주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자신이 전생에 무슨 훌륭한 일을 했는지, 이 커다란 행운을 어찌해야 하는지 매일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반려는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비닐봉지를 쓰지 않기 위해 장바구니를 사용하고 조금 가격이 나가도 생분해 봉투를 쓰던 재민이, 너무 바쁜 나머지 택배를 시켰는데, 떡하니 비닐봉지에 담겨 배송이 왔던 것이었다.    


재민은 실성 통곡을 했다. 저만 혼자 비닐봉지를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과 기업이 합심을 하여야 비닐봉지가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덜 쓰이라는 것을……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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