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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othing Mar 25. 2023

착한 사람


꼬리가 잘린 고양이가 있다. 그 고양이는 협소한 공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캣타워 꼭대기 위에 군림하고 있다. 하악질은커녕 그늘지고 음습한 곳에 숨으려 하지 않고 까만 눈으로 그저 인간을 굽어 살필 뿐이다.


나는 그 고양이가 꽤 불만이다. 금색 털들이 보얗게 허공을 배회한다. 그 털들은 코 속으로 목구멍 속으로, 또는 온통 까만 천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제 존재를 뻔뻔하게 전시한다. 촘촘히 짜인 니트류에는 털들이 콕 박혀서 돌돌이로는 택도 없다. 몸에 흡수된 털들은 포자가 되어 호흡기 이곳저곳에 달라붙는다. 목구멍에, 콧구멍에 곰팡이가 핀다. 콧물이 홍수가 되고 목구멍은 사막이 되고 가려움을 동반한 두드러기가 온몸을 덮는다.


내 눈을 직시하는 까만 눈이 엉덩이를 들어 올리더니 기지개를 켠다. 토실토실한 엉덩이에는 뭉툭한 꼬리만 있다. 육중한 몸이지만 폴짝 내려와서는 유유히 걸어가 물을 핥는다. 걸음걸이를 의태어로 표현하자면 사뿐사뿐이다. 살찌고 불쌍하고 고고하고 예쁜 고양이. 갑자기 꼴 보기가 싫어졌다. 플라스틱 막대기에 빨간 실이 연결되어 있고, 실 끝에는 작은 생쥐모양의 인형이 달려있는 장난감을 들어 이리저리 흔들었다. 까만 동공이 쥐 인형을 따라가느라 바쁘다. 나는 그것을 들어 침대 아래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아서라. 걔 쳐다만 보지 발 하나 까딱을 안 한다니깐"


고양이는 침대 아래를 끈질기게 노려본다. 살랑거려야 하는 꼬리가 장난감 강아지 인형처럼 뻣뻣한 게 웃음이 났다. 다갈색의 눈동자가 짤뚱한 꼬리를 훑는다. 시선은 꼬리를 훑고 정갈한 손은 금색 털들을 훑는다. 나는 비죽 올라간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안온한 방에는 옅은 햇살이 슬그머니 내려앉고 반짝이는 금빛 먼지가 가라앉고 있다. 금빛 먼지가 가라앉은 흰색 테이블엔 알레르기 약이 한가득이다.


착한 사람은 마조히스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품는 것도 고통, 외면하는 것도 고통, 사랑하는 것도 고통. 내 엉덩이에도 꼬리가 자라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꼬리가 자라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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