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첫 반려 식물은 언제 만났었나. 대학 진학으로 독립을 했지만, 대학생 때는 식물에 관심이 없었고, (되려, 비가 많이 내려 교정에 뱀 같은 지렁이가 나오는 날이면, 으악으악하며 겅중겅중 뛰어 등교했던 기억만 있다) 그 뒤, 취업을 위해 얹혀살 때는 식물을 돌볼 겨를이 없었으며, 처음, 혼자 살게 되었을 때는 식물을 하나둘 들였으나, 그리 오래 함께 하지를 못했다.
그리고, 신혼집에 으레 선물로 식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아주 작은 베란다에는 구에서 나눠주는 텃밭 상자도 하나 들여놓았다. 하지만, 그들도 시들시들 쳐지곤란이기에는 마찬가지. 이상하게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정말 “주거 면적”만 넓은 집이라 채광을 책임지는 창도 작고, 거실이라고 치기엔 애매한 구조의 집에 당연히 베란다는 없었다.
이전에 집이 베란다는 있어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새로 이사 온 곳은 그저 아이가 보행기 또는 붕붕이를 타고 다니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빼고는 집에서 채광만큼은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는 나에게도 햇빛과 바람이 필수조건인 식물에게도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우울한 날에는 ‘정수리에 햇빛을 맞으러 가야한다’. 혹은 ‘오늘은 해가 안 떠서 텐션이 안 올라오네..’ 라고 말하며 나의 삶에서 “날씨‘의 영향은 꽤나 많이 차지하고 있다.
“오늘은~”하고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살펴보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고, 거실에 드리운 햇볕 하나에 행복함을 느끼며, 햇볕에 반사된 둥둥 떠다니는 먼지를 보는 데서 평온함을 느꼈는데,
행복을 느끼는 기본 조건인 “햇빛”이 빠지니 이를 어쩌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을 곁에 두고 싶다는 끊임없이 생각이 들었고, 둘째 딸이 태어날 때쯤, 다시 하나 둘 좋은 인연으로 삭막했던 공간을 나의 욕심으로 초록으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주로 앉아서 생활하거나, 쇼파에 누워 생활했던 전과 달리, 아이와 함께 생활하면서 바닥에 함께 누워 창가에 올려둔 화분의 식물의 잎의 아랫면을 보는 날도 있고, 아이를 안고 주변을 서성이며 식물의 측면을 본 적도, 아이가 잠든 시간이면 창 틀위의 식물을 내곁으로 데려와 위, 아래, 옆을 화분을 돌려가며 혼자 식물 곁에서 나를 돌보듯 시든 잎을 떼어주고, 물을 주며 위로 받던 순간. 그렇게 식물은 대화를 나눌 이가 없는 내 곁에서 나와 함께 둘이 주파수를 맞춰가며 숨 쉬고 있었다.
유난히도 힘든 날에는, 마치 나처럼 풀이 죽어있는 모습도, 혹은 힘들지만 힘을 내야 하는 상황에는 더 푸른 잎을, 리프레쉬가 필요한 순간에는 연둣빛깔 연한 잎을 내어주곤 했다. 그 때문일까. 우리 집에 있는 식물이 한 개가 두 개가 되고, 두 개가 어느새 10개가 되었다. 그 식물 열 개에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고, 식물을 바라보는 날이면, 식물의 삶이 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첫째 아이와 함께 둘째를 기다리며 만들었던 개운죽 한계를 잊은 듯 자꾸 올라가는 올리브나무 코드가 맞는 이와 오랜만에 즐거웠던 카페 만남 후, 음료 위에 있던 로즈메리.
식물마다 담긴 이야기를 속살거릴 때, 나도 살아가기 위해 들숨을 내쉰다.
많이 키워보고, 많이 죽일수록, 많이 키운다는 이야기는 공감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아끼던 화분이 나의 무지함으로 떠나가면, 가슴 한쪽이 저릿해지는 게, 식물이 내 삶 속에 반려 식물로 자리를 잡은 게 아닐까-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지는 나의 작은 초록이들과 오래오래 함께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