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 분위기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평소보다 에어컨 온도가 높게 설정된 탓인지, 아니면 가득 찬 회의실 안 팀원들의 긴장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회색 카펫 위 똑같이 생긴 회의용 의자들만 한껏 삐걱거렸다. 나를 포함한 팀원들은 각자 노트북을 책상에 펼쳐놓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침묵을 깨는 말.
“왜, 팀 차원에서 대안 만들어서 빠르게 대응하지 않았나요?”
평소 쓴소리 안 하기로 유명한 이사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짧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지적하거나 특정한 건 아니지만, 모두가 그 화살이 자신을 향한 것처럼 느껴졌는지 다들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앞으로 상시 모니터링 해서 문제점 빠르게 파악하고 선조치하세요. 책임 지기 싫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무엇이 먼저인지는 이정도 연차들 정도면 알지 않아야 하지 않아요? 하루 이틀 일 한 것도 아니고.”
단호한 듯 감정적이었다. 큰 목소리는 아니지만 격양되어 있었다. 다행이다. 담담한 말투였다면 더 아프게 꽂혔을 것이다. 내 눈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꽤나 복잡한 상태가 되었다. ‘선 조치 후 보고’, 실무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적인 개념일 수 있겠다. 다만 실제 현장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현실은 사전 시뮬레이션에서 늘 벗어나기 일쑤다. 예측 가능 여부의 경계선이 사실상 희미하다는 말이다. 상황에 따라 급하게 결정해서 진행한 일들이 결국 예상치 못하게 실패한 대응사례가 되기도 하고, 전사적 대응 계획을 세우는 것이 먼저라 판단되어 선 보고했던 일들이 오늘의 회의에서처럼 책임 회피라는 화살로 돌아오기도 한다. 빠르게, 유연하게... 간단해 보이지만, 이 결정에서 가장 불안한 사람은 늘 '실무자'일 수밖에 없다.
회의가 끝났다. 팀원들은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의자에 잠시 더 앉아있기로 했다. 늘 있을 수 있는 지적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따가웠다. 포스트잇 한 장을 꺼내 대충 휘갈겨 썼다.
'선조치 후보고, 유연과 체계...'
며칠간만 모니터 구석에 붙여놓기라도 하자는 심산이었다. 나는 포스트잇을 노트북 사이에 끼워놓고 회의실을 떠났다. 어깨가 무거운 느낌. 이 무게가 저지른 일 때문인지, 앞으로의 막막함 때문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회사 문을 나서면서부터 한기가 느껴졌다.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4월의 밤공기는 의외로 쌀쌀했다. 마침 건물 유리벽에 비친 내 모습은 전혀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원인 모를 이유로 갈변하는 스투키 줄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선릉역 승강장은 언제나처럼 붐볐다. 출근길과 다를 바 없는 밀도였다. 나는 기계적으로 줄을 섰다. 첫 번째 칸, 두 번째 문 앞자리. 교대역 환승 통로로 가장 빠른 경로였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익숙한 순서로 밀려들었다. 나는 힘을 주어 몸을 끼워 넣었다. 자리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어깨와 어깨 사이의 간격은 좁았다.
전철이 출발했다.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지 않았다.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저 전철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바로 옆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대리님. 아, 그 파일요? 제가 작성하고 바로 팀장님께 넘겼어요. 네? 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대리님께 먼저 검수 요청드리겠습니다.”
맑고 또렷하려 노력하지만 당황이 묻은 목소리였다. 감정을 가리고 초연한 척 해도 티가 나는 건 사회 초년생의 특징이다. 나는 무의식 중에 그쪽을 돌아봤다. 가냘픈 체구, 무거워 보이는 가방, 양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쥔 모습. 전화를 끊은 그녀는 휴대폰을 턱 쪽으로 가져갔다. 표정은 담담하려 노력했지만, 휴대폰을 쥔 손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익숙했다. 익숙해서 서글펐다. 나도 저랬던 시절이 있었다. 무언가를 잘해보려다가, 어설프게 넘어지고, 쭈뼛거리며 사과하고, 눈치 보며 하루를 버텼던 시간. 지금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회의실에 앉아 있던 오늘 오후의 내 모습은 과연 얼마나 나아진 걸까? 그 회의의 지적은 나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 테지만, 나는 이상하리만큼 그 장면에서 오래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허공으로 돌렸다. 그때 생각났다. 회의실에서 갑자기 휘갈긴 메모장. ‘선조치 후보고, 유연과 체계...’ 무심코 썼던 문장이지만, 지금 전철 안에서 사회 초년생 동료(?)의 통화를 듣고 나니 그 문장이 묘했다.
전철은 강남역을 지나 교대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나는 3호선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곧 도착한 열차에 몸을 실었다. 3호선은 조금 전의 2호선보다는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창밖을 보거나, 눈을 감거나,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이번에는 출입구 쪽 창문 바로 앞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창밖은 어두웠다. 간간이 스쳐가는 빛들이 나름 바쁘게 열차 뒤편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열차가 한강을 건너던 찰나 오늘의 일들이 사진처럼 스쳤다.
회의실,
책망,
포스트잇,
감정적으로 휘갈긴 문구,
사회 초년생의 통화.
과연 나는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자주 "일단 하고 보자"라는 마음으로 살았을까. 혹은 반대로 "괜히 움직이지 말자"라던가, "괜한 일 만들지 말자"라며 스스로를 붙잡아두었던 날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무엇이 나와 가깝고, 무엇이 나와 먼 거리의 사고였을까? 선별할 수 없다. 둘 다 필요하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불편해도 단계를 준수하는 신중함. 어느 하나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하루들이었다. 사회 초년생의 떨리던 손도, 막연함에 휘갈겨 쓴 포스트잇의 문구도, 결국은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향해서.
전철은 원흥역에 도착했다. 나는 전철에서 내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바람은 조금 찼다. 밝은 달빛 때문인지 밤하늘이 남색에 가까웠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익숙한 우리 동네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묘한 남색의 냄새였던가. 내일도 나는 퇴근길 전철, 그 칸,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우연히 오늘 마주했던 낯선 이들을 내일도 일부 마주할지 모른다. 어떤 역에서는 사람들이 우르르 탑승하고, 어떤 역에서는 우르르 내릴 것이다. 마치 다가오는 물살을 억지로 거슬러 오르려는 연어 떼처럼, 각자의 피로와 무게감을 헤치고 도시를 건널 것이다.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폐를 비운다는 느낌으로 끝까지 숨을 내쉬고는 그냥 그렇게 집을 향해 걸었다. 무언가 정리되진 않았으며 그저 동일한 채로. 어떤 거창한 다짐이나 결심도 없이. 선택의 기로는 앞으로도 많을 테고, 책망과 막막함도 무수하겠지만, 뭐 어떤가. 모든 상황에 절대적으로 옳은 판단이란 건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돌파하는 것이 정답일 수도, 신중히 멈춰서는 게 더 나은 길일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건, 그때마다 내가 왜 그렇게 선택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내 중심, 기준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는 내일도 그 중심을 지키며 내일도 부단히 헤엄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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