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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이 없다고요?

FM, 길을 잃다.

by 식빵이

일을 시작하면서 "너 FM이구나", "얘는 저보다 더 FM이에요"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정확한 뜻은 몰랐지만 맥락상 유추한 의미는 "엄격한, 융통성 없는, 원칙을 중요시하는" 정도였다.

굳이 유래를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다가 비교적 최근에 유래를 알게 되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야전교범인 Field Manual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뜻은 얼추 내가 예상한 것과 일치했다. 오호라, 매뉴얼대로, 정석대로라... 유래를 알고 보니 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왔는지 좀 더 와닿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그어준 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담히 선 밖을 활보하는 자유를 꿈꿔왔다.

이런 모순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며 약간 해소되었다. 여전히 틀 안에서 얌전히 공부하는 듯하면서도, 그 학문이 바로 나에게 어떤 것에든 "왜"라고 질문하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나는 오히려 관습에 대한 저항 의지가 아주 강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첫 사회생활 때부터 FM이라는 피드백을 들었다. 가끔은 부정적인 듯 들리기도 하였으나 또 가끔은 칭찬 같기도 해서, 그때는 그냥 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여러 원칙들 중 나는 특히 대원칙을 중요시했던 것 같다. "사람 중심 실천", "인권 기반 실천", "역지사지". 이 가치는 내게 대원칙으로서 내가 이 업에서 하는 모든 행위의 근본적인 목적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관습적으로 이어져 오던 어떤 업무들이 내가 생각하기에 이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싶으면 나는 잘 동의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제시하려 했다. 이런 때에 선배님들은 나를 두고 FM이라고 혀를 내두르시면서도, 신입 복지사로서 이상을 놓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신 것 같다.

한편, 관습에 대해 저항하던 시기에조차 관습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감탄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자료들이 모이고 모여 회사의 체계를 만들어냈구나. 체계가 갖춰진 회사는 내 생각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가 정형화되니 일하기가 너무 편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정형화된 서류 작업은 내게 이중적인 느낌을 주었다. 빠르고 편한데, 너무 고민 없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묘했다. 그래서 내 딴에는 어떤 사업을 맡았을 때, 그 사업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맡았기에 달라진 점, 나만의 한 끗을 뭐라도 남기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게 늘 쓰는 서류를 살짝 수정하는 방식이 되었든, 아예 새로운 결과물을 하나 추가하는 방식이 되었든 그렇게 차별점을 남겨 조금이라도 그 사업이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했다.

그렇게 관습이라는 포근한 틀 안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던 내게, 위기가 닥쳤다.


FM이라 욕을 먹든 칭찬을 받든 그것은 어쨌든 매뉴얼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매뉴얼이 없는 회사를 만난 것이다.

신입 직원에게 대표적인 매뉴얼이라 함은 단연 인수인계서일 것이다. 우선 인수인계서부터 없었다. 업무분장표에 적힌 업무 리스트 외에 그래서 어떤 업무를 언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파악할 자료나 설명이 제공되지 않았다. 물론 전임자가 퇴사하지 않아 계속 물어볼 수는 있었지만 바쁜 사람을 붙잡고 그 많은 업무를 어느 세월에 하나하나 물어보며 한단 말인가. 상사가 전임자에게 "바쁘니까 인수인계서 그냥 쓰지 마"라고 하는 것조차 내가 직접 들어버린 마당에.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바로 정형화된 문서가 없었다는 것. 문서에 대한 피드백이 매상황 달라져 어떤 것도 마음 편히 참고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고민을 해서 결재를 올려도 생각도 못한 부분(주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에서 피드백을 받았고, 이를 수정하느라 사업 착수가 지연되었다. 심지어 공문서 문장부호, 띄어쓰기 방식도 내가 배워온 것과 달랐는데, 피드백도 때에 따라 달라서 외울 수조차 없었다. 나에겐 이 모든 상황이 혼돈 그 자체였다.

매뉴얼이 없어보니 깨달았다. '나 FM 맞구나'.


관습에 대해 저항하는 거, 그거 참 감사한 일이었구나. 관습이 없어보고야 깨달은 것이다. 나 관습 사랑하네. 200% FM이네.

길을 잃었다. 문서를 쓸 때마다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으니 점점 지쳐갔다.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도 문서 단계에서부터 길이 턱턱 막혀 막상 착수할 때에는 에너지가 이미 많이 소모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자포자기를 택했다. 사업할 에너지를 아끼고 싶어 문서를 포기한 것이다. 어디 내놓기 창피할 정도의 문서를 써내기 시작했다. 내가 공을 들여도, 자포자기해도 어차피 수월하게 결재받지 못할 거, 힘이라도 아끼자고 판단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좀 부끄럽지만) "너 같이 오타 한 번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는 애 처음 본다"는 피드백을 받던 내가, 불과 1년 사이에 (이건 이거대로 부끄럽네) "어디서 배웠는지는 몰라도 기본이 안 돼있다"는 피드백을 받게 된 것이다. 적어도 FM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는가?

이 경험으로 내가 느낀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매뉴얼이 없으면 업무 효율성이 많이 떨어진다. 담당자가 불필요한 곳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여 사업할 기운이 빠진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그렇게 되면 그 피해가 누구에게 갈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둘째, 조직은 사람을 가꿀 수 있다. 어떤 조직에서는 꽃처럼 가꿔지던 사람이 어떤 조직에서는 잡초 취급받을 수 있다. 조직원을 어떻게 가꾸어 회사에 어떻게 기여하게 할 것인지 잘 판단해야 장기적인 손실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런저런 평가에 휘둘리지 말자는 것이다. 위와 같은 극단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든 생각이다.

평가는 참 주관적일 수밖에 없구나. 나 또한 환경에 따라 실제로 많이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는구나. 지금까지 나도 내가 엄격한 편인 걸 알았기에, 엄격한 피드백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기에 나는 내가 채찍이 더 먹히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당근을 좀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점도 깨달았다.

끝으로 매뉴얼, 관습, 전통... 이런 것을 쌓아오신 모든 사회생활 선배님들께 경의를 표한다(나는 어쩔 수 없는 FM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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