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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레카 권 Jun 25. 2020

향기, 실체의 영혼 같은...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영화. 그리고 원데이 조향 클래스.


향기들은 그냥 공기 속에 방치하면 단 몇 시간만 지나도 벌써 향기가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향수 제조인들은 이러한 숙명적 상황에  맞서기 위해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향기들에 오래 지속되는 향기들을 혼합함으로써 자유를 향한 향기의 열망에 족쇄를 채워 왔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290페이지 -



전문가의 손에 채집된 향기들이 각자가 스며있던 실체의 이름표를 달고

똑같이 생긴 유리병에 갇힌 채 탁자 위에 놓였다.


뚜껑을 열고 스포이트 끝을 시향지에 갖다 대니 기다렸다는 듯 향기가 왈칵 새 나온다.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영혼 같은 향기가 실체를 떠올릴 수 있다 사실이 경이롭다.





원데이 조향 클래스... 향기들을 섞어 새로운 향을 만드는 매력




그레이프푸룻, 아네모네, 엠버, 그리고 샌달우드...


수많은 향기 중에 엄선한 향들내가 계산한 비율로 섞고,

베이스액을 부어 나만의 향수를 만들면서 쥐스킨트의 책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를 떠올렸다.




원데이 조향 클래스 후 다시 펼친 책, 그리고 같은 제목의 영화 <향수>...








냄새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풍부함과 언어의 빈곤함으로 인한 그 모든 이상한 불균형들로 인해서 그르누이 소년은 말의 의미를 포기하게 되었다.   - 43페이지 -


비린내 가득한 생선 좌판, 물고기 내장과 함께 갓 출산한 아이를 버린 엄마는 사형에 처해지고, 아이는'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라는 이름을 달고 보육시설에 옮겨진다.


지독한 냄새가 후각을 지나치게 자극해서일까, 포근하게 젖을 물려주는 엄마 냄새를 찾지 못해서일까.

그르누이는 세상의 온갖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천부적 후각을 갖고, 언어가 아닌 냄새로 세상을 인지해간다.


마른풀 냄새, 비에 젖은 풀 냄새...

그르누이가 맡을 수 있는 온갖 냄새를 표현하기에 언어는 턱없이 제한적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언어'라는 것으로 우리의 오감을 온전히 표현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완전한 세상, 풍요로운 마법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전혀 새로운 향수였다. - 133페이지 -


더 이상 새로운 향기를 만들어 낼 공식도, 아이디어도 갖고 있지 않은 늙은 향수 장인 주세페 발디니.

비굴하지 않게 물러날 준비하던 그에게 찾아와 라이벌의 향수 <사랑과 영혼>을 그대로 제조해 보인 그르누이.


정해진 공식이나 공정 없이 만들어낸 '전혀 새로운 향수'를 맡으며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고 <나폴리의 밤>이라는 이름을 쓴 상표를 붙이고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다.




향수 장인 주세페 발디니...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 더 생생하다




노래나 맛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고, 어느 순간을 소환하듯 향기도 그렇다.


노래는 귀로 들어가 눈앞에 영상을 펼쳐내고,

맛은 입으로 들어가 어느 순간을 재현하고,

향기는 코로 들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닿게 한다.




옷을 갈아입듯이 그르누이는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향수를 번갈아 발랐다.   -277페이지 -

   

때로는 나를 감추기 위해, 때로는 나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가면을 쓰듯 향수를 바른다는 설정이 매력적이다.


평소에는 교복, 유니폼으로 조직의 보호를 받고

소풍이나 야유회에는 개성 있는 패션으로 돋보이고 싶은 마음...


누구나 품고 있는 이중적인 마음을 충족해 줄 수 있는 향수가 있다면  

모두가 마음껏 그런 향수를 번갈아 바를 수 있다면

과연 세상은 어떻게 될까. 사랑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실체의 영혼이 향기라면, 나의 영혼은 어떤 향일까...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세상에서 가장 악취가 심한 곳에서 냄새도 없이 태어난 그가,
쓰레기와 배설물, 그리고 부패 속에서 성장한 그가,
따뜻한 인간적 영혼도 없이 오로지 반항심과 역겨움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외모와 마찬가지로 내면세계 역시 괴물인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데 성공한 것이다.      -358페이지 -


그르누이가 향기에 집착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탐나는 향기를 손에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을 못 느낀 그는 과연 괴물일까.


어쩌면 지독한 생선 비린내 속에서 그가 애타게 찾은 냄새는 달큼한 젖 냄새, 포근한 엄마 냄새였을지 모른다.



사람의 체취는 체온과 체온을 맞대면서 생겨나는 걸까.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그르누이.

그래서 그에게는 체취가 없었던 건 아닐까.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벌레취급만 받아온 그에게 '인간'이란 그저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존재일 뿐...


'사랑' 같은 '인간적인' 것을 배우지 못한 그에게 '비인간적'이라고, '괴물'이라고 비난만 해도 될까.

 

누군가 소외된 채 방치된다면, 그 공동체에 속한 모두에게 일말의 책임을 물을 수 있지 않을까...

연이어 터진 아동학대 사건이 소설 문장에 포개져 심장이 뻐근하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영화에서 그르누이가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 장소  [ 스페인 바르셀로나 산 펠리프 네리 광장  2020.1.11. ]




그는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유일한 감정인 증오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갈고 싶었다.   -360페이지 -


부모의 사랑도, 양육자의 관심도 받아본 적 없는 그르누이.

노예처럼 목숨을 걸고 노동을 하며 버텨온 그의 인생은 '단 한 번도'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다.


향기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과 생존을 위한 거짓말.

<단 한 번>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가 인생에서 습득한 유일한 감정인 '증오'를 드러낸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이것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이끌어 내는 힘이 있다.
아무도 그걸 거역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꼭 한 군데 있으니, 그곳이 바로 그르누이 자신이다.


그의 집요함은 타인의 사랑을 이끌어 내는 향기를 만들어냈지만 자신의 사랑은 끝내 이끌어내지 못한다.

거울 없이 나를 못 보듯, 나의 체취를 내가 못 맡듯, 모두를 속여도 자신은 못 속이듯...




사랑은 주고받으며 배우는 것이겠지. 때로는 실패하면서...




스스로는 아무런 체취도 없으면서 세상의 모든 냄새를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사악한 주인공이 최상의 향수, 즉 가장 좋은 체취를 얻기 위해 스물다섯 번에 걸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집념의 일생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 옮긴이 <강명순>의 글 중에서 -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으면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온갖 냄새가 선명하게 맡아지는 기분이 든다.


톰 티크베어 감독의 같은 제목 영화는 원작 소설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시각, 청각, 후각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문장'의 친절한 묘사를 먼저 접하고 영화를 보는 것이 영상에 생각을 얹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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