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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레카 권 Sep 08. 2020

시칠리아에서 길을 잃어도 좋으련만...

책 <오래 준비해온 대답-김영하의 시칠리아>를 읽고

언제 다시 떠날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이 여기저기서 함박웃음으로 터져 나오는 탑승구의 풍경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자유롭게 나라와 나라를, 도시와 도시를 오갈 수 있을 때, 어디로 여행하고 싶으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나는 어디라고 대답할까?


저자 김영하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칠리아라고 대답했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연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남부지방을 잠시 다녀왔지만 일정 때문에 가보지 못한 '시칠리아' 지역은 어떤지, 나의 여행을 떠올리며 새로운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펼쳤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의 시칠리아


어떤 나라나 도시를 마음에 두었다 한동안 잊어버린다.
그러다 문득 어떤 계기로 다시 그곳이 떠오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곳에 가 있다.

11페이지 <프롤로그>에서


아직도 가보지 못한 나라, 가고 싶은 도시가 너무 많다.
코로나19 때문에 개인적인 교류도, 국가적인 교류도 막혀버린 현실이 안타깝다.

지금은 책을 읽으며, 영상을 보며 마음부터 보내 두고
언젠가 문득 어떤 계기로 그곳에 서 있기를 상상한다.




사서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게 왔다가 그대로 가도록 하는 삶,
시냇물이 그러하듯 잠시 머물다 다시 제 길을 찾아 흘러가는 삶.
음악이, 영화가, 소설이, 내게로 와서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가는 삶.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이런 인생을 흘러가는 삶, 스트리밍 라이프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36페이지


여행도, 인생도 어느 순간에 영원히 멈춰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고 '더 가지려', '더 성공하려' 애쓰며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문장 하나 더', '대사 하나 더' 기억하려 애쓰던 마음을 조용히 내려놓고,
시냇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레 흘려보내려는 마음을 가져본다.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91페이지


때때로 낯선 곳에서 내가 잊고 지내던 어느 시절의 냄새를 맡게 되고, 소리를 듣게 되는 것.
그것이 여행이 주는 세렌디피티 일지 모른다.

시공간을 넘어서 내면에 있는 '나'를 만나게 되는 시간..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계속하려는 건 지 모른다.


시공간을 넘어서 내면에 있는 '나'를 만나게 되는 것, 여행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124페이지


황홀한 풍경 앞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가슴으로 담아 몸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짜릿한 통증...

김영하 작가의 이 문장이 내 심장에 통째로 스민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을 왜 훗날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죽음이 내일 방문을 노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와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247페이지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을 누리는 삶, 물 흐르듯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가장 현재를 즐기는 삶이고, 죽음을 기억하는 삶일지 모른다.

죽음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메멘토 모리"
죽음이 당장 들이닥쳐도 후회 없게 "카르페 디엠"



지금, 여기에서.. 메멘토 모리..카르페 디엠..


시칠리아는 나에게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이탈리아에서 내가 세운 여행 계획을 착실히 지키고 돌아오려는 마음은 어리석다.

기차의 연착과 취소. 분실과 도난.
비슷한 골목 사이에서의 방황...

낯선 곳에서 처음 겪게 되는 당혹스러운 상황도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마음에 여유 세포가 조금 생긴다.

현지에서 살아가는 그들처럼...



어쩌면 그들이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 수 있는 비결은 '반복'에 있지 않을까.

그들의 일상을 얕게라도 겪으면서 여행자들도 어느새 그들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왕이면 즐기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건지 모른다.
 


여행은 때때로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게 한다.
여정 가운데 질문과 해답을 찾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돌아온 일상에서 늦은 해답을 찾기도 한다.


이런 여행 산문집을 통해 지난 나의 여행을 되돌아보며 또 다른 질문과 해답을 찾는 것 또한 새로운 여행이다.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이면 여행 준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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