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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레카 권 Aug 21. 2020

인생은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를 읽고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인 천명관 작가의 "고래"를 읽으며

엄청난 고래의 출몰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은 '논리'로 이해하기보다 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읽으면 된다.

가끔은 허무맹랑하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에이-말도 안 돼'라고 하면서도

재미있고 솔깃한 그런 이야기...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 고래... 한국 현대문학 바다에서 고래를 만난 기분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10페이지 춘희와 같은 감방 여죄수의 말


짧은 한 문장이 나를 겸허하고 진지하게 만든다.

책상 위에 쌓인 먼지를 물티슈로 닦아내며 하루를 여는 아침마다 당분간 이 문장이 생각날 것 같다.

매일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는 내 마음이 어제 쌓인 먼지를 닦아내듯 정성스러운 환영으로 반짝이기를...




어떻게 서로 미워하지도 않는데 화를 내며 싸우고,
사랑하지 않는데 왜 눈물이 나오는지
그녀는 의아했다.

98페이지 금복이 처음 '영화'를 보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우들의 '진짜 같은 연기'를 보면 우리는 감탄한다.

현실에서 누군가의 '진짜 같은 연기'를 보면 우리는 비난한다.

가식, 위선, 거짓이라며...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잘 해내지 못해도 연기를 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삶을 버티게 해주는 여러 관계를 지키기 위해 괜찮은 척, 안 아픈 척, 좋은 척...

우리 삶이 영화일까, 드라마일까. 현실일까.

이런 우리를 서로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원하는 건 다정한 위로가 아닐까.




서로에게 원하는 건 다정한 위로일지 모른다




과연 객관적 진실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117페이지


누구에게나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객관적 진실'은 없을 것 같다.

각자의 입장과 상황이 프리즘처럼 어떤 사건과 사실을 굴절시켜 흡수되는 건지 모른다.

각자의 기억이 다르듯 각자에게 흡수된 진실도 다를지 모른다.




당연하지.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141페이지 코끼리 점보와 춘희


말을 못 하는 춘희와 코끼리 점보...

동화처럼 아름다운 둘의 교감이 책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이질적이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그으며 만나고 싶은 이들을 떠올리듯...

춘희도 점보가 보고 싶었겠지.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그녀의 특별한 재능은
바로 그런 한없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며 덧없이 스러져버리는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자신의 오감을 통해 감지해내는 것이었다.

149페이지 춘희...


평범하고 무의미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벙어리 춘희에게는 오감으로 느끼고 교감할 소중한 것들이었다.

어쩌면 '말'을 내뱉는 행위는 오감을 발달시킬 기회를 비용으로 하는 건지 모른다.

'말'로 분출하든지, 오감을 발달시키든지, 또 무언가를 하든지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은 같을 테니...

감탄을 금할 수 없는 명화, 문학 등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고독한 침묵이 빚어낸 진주 일지 모른다.




춘희에게 금복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신기루와도 같았으며,
춘희의 바람은 끝내 채워질 수 없는 허기와도 같았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그녀를 평생 따라다닐 아득한 그리움이 되고 말았다.

200페이지


눈 앞에 보이기는 하지만 닿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존재가 그 누구도 아닌 '엄마'라면 기분이 어떨까...

의붓아버지 文의 보살핌을 받고, 코끼리 점보와 교감을 나누었지만 눈 앞에 보이는 엄마에게 다정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춘희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고독한 침묵이 빚어낸 진주...






끝없이 상실해가는 게 인생이라면 그녀는 이미 많은 것을 상실한 셈이었다.

264페이지


상실해가는 게 인생이라 생각하면 한없이 서글퍼진다.

세월이 내게 준 것들을 다시 내려놓아가는 것이 인생이긴 하지만

수많은 상실 가운데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찾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인생의 마지막에 나는 빈 손으로 눈 감더라도 사랑과 감사, 평안과 축복으로 충만하길 바란다.



저에게 소설은
여전히 가장 자유롭고
가장 새로운 예술 장르입니다.

수상작가(천명관) 인터뷰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새로운 예술 장르, 소설




가장 마음이 갔던 등장인물, 춘희...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만들며 살았던 춘희...
어쩌면 그녀는 고립을 원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엄마인 금복을 그리워했고, 트럭 운전사를 기다렸고, 벽돌에 그림을 그렸다.


(좌) 춘희가 벽돌에 그린 그림(잠자리도, 족제비도 한 쌍), (우) 독토맘 써니 회원님의 아들이 4살 때 그린 그림(한 쌍 ㅋㅋ)





한 쌍의 족제비가 사랑을 나누듯
한 쌍의 잠자리가 사랑을 나누듯
우리 다시 만나
예전처럼 함께 사랑을 나누어요.
그대, 어서 돌아오세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417페이지  춘희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한 시인이 남긴 시



등장인물이 그린 그림을 실은 소설...

작가의 재치와 손그림이 허구의 이야기에 생동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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