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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레카 권 Nov 11. 2020

정든 세상아, 정말 아름답구나.

<빨강 머리 앤 >을 다시 읽고...

사랑스러운 내 친구, 빨강 머리 앤...


어린 시절 나를 꿈꾸게 했던 <소년소녀 세계명작 전집>을 친정 책장에 골동품처럼 소장하다가
결국 열다섯 권 정도만 남기고 버렸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다시 펼친 추억의 <빨강 머리 앤>.
상상에 빠진 빨강 머리 앤의 모습에 초롱초롱한 눈으로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는 어린 시절 내 모습이 포개진다.

어린 시절 나를 꿈꾸게 했던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


여러 버전의 <빨강 머리 앤> 책에 삽화가 들어가 있지만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TV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원화만큼 내가 상상하는 앤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삽화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TV 애니메이션 원화 가 들어간 <빨강 머리 앤>을 읽으면서 촉촉한 가을을 지나왔다.




예쁘다고요? 예쁘다는 말로는 모자라요.
아름답다는 말도요. 그런 말로는 한참 부족해요.
아, 황홀하다, 황홀하다는 말이 좋겠어요.

43페이지, 아름다운 가로수길에게 '기쁨의 하얀 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 전 앤의 말


똑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감탄의 크기는 다르다.
똑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감사의 크기도 다르다.

누군가의 감탄은 옆 사람도 설레게 하고
누군가의 감사는 옆 사람도 기분 좋게 한다.

'예쁘다', '아름답다', '황홀하다'... 최상의 표현으로 찬사를 보내려는 앤의 해맑은 열심에 덩달아 설렌다.




마음의 친구요. 친한 친구 말이에요.
마음속 깊은 얘기까지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진짜 마음이 통하는 친구 있잖아요.
그런 친구를 만나는 게 평생 꿈이었어요.

111페이지


평생 단 한 명이면 충분하다.
마음속 깊은 얘기까지 모두 털어놓을 수 있을 친구 한 명 있으면 인생을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있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어루만져주는 것...
그것이 인간다운 삶일 테니...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에 '케이티 모리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골짜기 메아리에게 '비올레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친구처럼 대화하던 앤이
다이애나라는 진짜 친구를 만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얼마나 컸을까.

평생 꿈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의 희열이...




뭔가를 기대하는 건 그 자체로 즐겁잖아요.
어쩌면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대할 때의 즐거움은 아무도 못 막을걸요.

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쁜 거 같아요.

174페이지


실패가 두려워 애초에 도전하지 못하는 마음...
호기심 많은 앤을 닮았던 아이도 어쩌다 보니 마릴라 같은 어른으로 자라기도 한다. 나처럼...
 
실망이 두려워서 기대마저 하지 않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방법인 줄 알고, '보통'의 범주에 묻혀 소심하고 소극적으로 살아가려는 나를 당돌한 앤의 말이 깨워준다.

어릴 때의 호기심과 기대하는 마음, 내 안에 가라앉아 있는 앤 같은 마음을 다시 일으켜 보라고...




아, 정말 멋져! 이건 네가 없는 캄캄한 길을 영원히 비춰 줄 한 줄기 빛이야, 다이애나.
아, 한 번 더 말해 줄래?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앤. 앞으로도 항상 그럴 거고, 그건 믿어도 돼.

238페이지 앤과 다이애나의 작별 전 맹세


나의 우정, 나의 사랑을 앤처럼 기쁘게 받아들이는 친구에게
한 번 더, 아니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말해 줄 수 있겠다.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앞으로도 항상 그럴 거고."

나에게도 종종 들려주길,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어려운 일이 아닌가 봐요.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돼서 정말 기뻐요.

282페이지  다이애나 아버지의 숙모, 조세핀 배리 할머니와의 우정을 갖게 된 앤의 고백


학창 시절에도, 대학에서도, 직장에서도, 온라인에서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기도 하다.

마음이라는 건 객관적으로 잴 수 있는 자는 없다.
누군가에겐 만나자마자 내 마음을 잔뜩 내어주게 되고,
오래도록 만난 누군가에겐 내 마음이 새어 나갈까 봐 감추게 되기도 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생각만큼 어렵기만 한 건 아니겠지만
생각보다 놀라운 기적인 것도 사실이다.




오늘 저녁은 꼭 보랏빛 꿈같지 않니, 다이애나?
살아 있다는 게 정말 기쁘다는 생각이 들어.
아침에는 늘 아침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저녁이 되면 또 저녁이 더 아름다운 것 같단 말이야.

400페이지


'아름답다', '황홀하다'는 직접적인 표현도 좋지만,
때로는 '보랏빛 꿈같다'는 은유적인 표현이 주는 더 큰 설렘과 감동을 앤은 잘 알았다.
그런 앤의 표현은 곁에 있는 다이애나의 마음에 까지 고운 보랏빛깔로 번져갈 테지...
 
앤에게 아침이 아름답고, 저녁도 아름다운 건 앤의 마음과 관점이 아름다워서겠지.
나의 마음과 관점도 누군가에게 고운 빛깔로 스밀 수 있기를...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예쁘고 소중한 생각들은 보석처럼 마음속에 담아두는 게 더 좋아요.
그런 생각들이 비웃음을 당하거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게 싫거든요.

437페이지 열다섯 살 소녀가 된 앤


상상대로, 마음에 품은 대로 마음껏 쫑알대던 어린 앤도 자라면서 급격히 말수가 줄어든다.
어른들의 표현으로 이것이 '철이 든다, 세상 물정을 안다'는 걸까?

선악과를 따먹고 벗은 줄 알고 부끄러워했던 아담과 하와처럼,
나의 말이 사람들의 비웃음과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나의 마음과 다른 '세상 물정'을 알아갈수록 말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겠지.

어쩌면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절실한 게 아닐까.




앤. 그렇게 엉뚱한 짓들을 벌여도 좋으니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면 좋겠구나.
이제 이렇게 자라서 여길 떠나다니...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주머니의 어린 앤이 있어요.
평생토록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와 초록 지붕 집을 날마다 더 사랑할 앤이요.

472페이지 학업을 위해 떠나기 전 마릴라 아주머니와의 대화


키도 쑥 자라고 몸무게도 부쩍 늘어서 점점 아이 티를 벗어가고 있는 초등 3학년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 앤을 그리워하는 마릴라의 마음에 조금씩 내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보들보들한 아기 피부, 너무 좋아" 하며 아들의 볼을 비비니
"엄마, 내 생각엔 아기 피부는 한 2년? 남은 것 같아. 많이 만져" 하는 아들...

아이의 엉뚱한 추리가 어른의 논리에 얼추 맞아떨어지니 그저 웃프다.




난 야망이 많아서 참 다행이야.
야망이란 결코 끝이 없는 것 같아...
하나를 이루면 또 다른 꿈이 더 높은 데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으니까.
덕분에 인생이 이처럼 재미있잖아.

481페이지


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건 그만큼 삶에 열정이 있다는 것이다. 열정이 있는 한 늙지 않는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새로운 도전을 찾는 기쁨...
이왕 해야 할 일이라면 재미있게,
이왕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재미있게!





앤은 무지개처럼 여러 빛깔이 있고 그 색색마다 하나같이 예쁘다니까.
그 애는 스스로 사랑받게끔 행동해.

486페이지  배리 할머니의 말


TV 애니메이션 주제가 가사가 떠오른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주근깨로도, 홍당무같이 빨강 머리로도 감출 수 없는 앤의 매력은
누구보다 '크게 기뻐하고, 크게 감사하고, 크게 감격하는' 순수함...
그리고 뛰어난 상상력이 그려내는 긍정의 에너지가 아닐까.

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앤과 함께 있으면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앤의 무지갯빛 매력을 모두가 탐했으면 좋겠다.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길모퉁이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518페이지 대학을 포기하고 교사가 되려는 앤 셜리의 말


인생은 결코 평탄한 대로만 펼쳐지지 않는다.
때로는 비포장도로, 때로는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앤의 말을 떠올리면 좋겠다.
비포장도로 끝에, 막다른 골목을 돌아설 때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기로 선택한 앤처럼...

길모퉁이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한 앤의 말을 믿고 싶다.

 


정든 세상아,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네 안에 살아 있다는 게 기뻐.

522페이지


때로는 견디기 힘든 아픔과 슬픔, 고통을 주는 인생일지라도
이 세상에는 분명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세상 속에 살아 있어서 기쁘다는 앤의 고백이
10월의 가을 하늘처럼 맑고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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