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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레카 권 Nov 26. 2020

그 누구도 누군가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를 읽고


책장을 덮어도 소설 속 장면이 계속 펼쳐질 때가 있다.

익숙한 일상의 공간에 소설 속 장면이 포개질 때가 있다.

문장은 잊혀도 주인공에게 이입했던 감정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때가 있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선 <19호실로 가다>를 읽고 나는 그랬다...





한 편의 멜로드라마라고 생각했던 결혼생활이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결혼생활과 똑같았음을 알게 되었듯이,

18 페이지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에서


북적이는 결혼식장을 가득 울리던 결혼행진곡처럼 아름답고 근사한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다.

막연히 로맨틱했고, 무턱대고 핑크빛이었던 신혼의 환상은 곧장 임신과 육아라는 변수로 깨졌다.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인 듯 우아하게 웃던 나도 어느새 징징대는 아이를 쿡! 쥐어박는 무식쟁이 아줌마가 되어있다.


'버럭버럭, 미치겠다' 하는 마음과 '참을 인. 참을 인... 하브루타... 하브루타...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자'는 다짐이 시시각각 결투를 벌이는 나의 마음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내 결혼생활은 특별하다는 환상이 깨지고 다른 사람들의 결혼생활과 똑같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나는 묘한 위안을 받았다.   

    


'엄마도 나처럼 힘들었겠구나... 당신도 나처럼 힘들구나...' 하는 공감이 나를 조금 더 자라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져서 그걸 몸에 지니고는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내 심장은 내 첫사랑에게 수천 가지 애착을 소중히 품고 있었다.

85페이지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에서


심장이 품을 수 있는 감정의 용량은 얼마나 될까?

심장이 버틸 수 있는 슬픔, 심장이 감당할 수 있는 설렘의 무게가 궁금하다.

심장을 잃으면 한결처럼 가벼울 수 있을까...?


때로는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때로는 물 머금은 솜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심장'에게 묻는다.

 



침대는 독서, 생각,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여기는 내 방이다.

144페이지  <방>에서


확 트인 거실보다 너른 부엌보다 작고 아늑한 침대 위 이불속이 좋다. 아이가 잠든 시간의 침대는 더더욱 좋다.


사방의 어둠이 짙어지는 시간 잔잔한 음악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마음껏 상상을 펼칠 수 있는 곳.                    

여기가 내 방, 내 침대다.







아마도 우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기다린 게 아닌가 보죠.

269페이지 <20년>에서


만남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서로의 곁을 내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우리이길...




이런 것이 인생이었다.
아무리 신중하게 선택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 해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

283페이지 <19호실로 가다>에서


서로에게 전부일 듯 사랑하고, 전부인 듯 신뢰하다가

서로에게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전부가 될 수 없는 서로이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을 가꾸어 가려 노력하는 것...

이런 것이 인생일지 모르겠다.







뭔가를 이해한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다.

284페이지 <19호실로 가다>에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용서'라고,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는 최대한 그 입장이 되어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 '용서'라는 문장은 성경 구절만큼 거룩하게 다가온다.

과연 나는 진정한 용서를 베푼 적이 있었던가...

 



수전은 그 시간 동안 가정의 중심에서 자기만의 삶이 있는 여성으로 서서히 해방될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2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뿌리로 삼아 꽃을 피울 것이다.

288페이지 <19호실로 가다>에서


돕는 베필로서의 아내 역할, 아이를 보살피고 키우는 엄마 역할...이 역할들이 아무리 보람 있고 가치 있다 할지라도 '자기만의 삶'을 모조리 잃어버리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애쓰는 수전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져 책을 덮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수전은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잊지 말고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결코 무아의 경지에 빠질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296페이지 <19호실로 가다>에서


어쩌다가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머릿속은 온통 일상의 시간표로 가득하다.

아이는 안전히 귀가했는지, 배고프지 않을지, 베란다 창문은 잘 닫혀있는지...

일상의 시간표와 자잘한 걱정들로 모처럼의 자유 시간도 제대로 만끽할 수 없어 마시던 커피잔을 서둘러 비우고 읽던 책을 급히 덮고 귀가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결코 무아의 경지에 빠질 수 없는 수전은 바로 내 모습이다.




식구들과 파크스 부인은 이곳이 '엄마의 방'이며,
엄마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매슈와 아이들은 엄마가 해주는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진지한 대화를 여러 번 나눴다.

300페이지 <19호실로 가다>에서


가장 높은 방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지만 이내 식구들의 방이 되어버리고,
결국 수전은 집 밖으로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나선다.


프레드 호텔 19호실.

그녀가 사는 집보다 더 그녀의 것 같았던 공간.


나도 절실히 갈망한다. 집 밖의 내 공간, 나의 19호실을...







<19호실에 가다>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은 196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삼아 혼란스러웠던 1960년대 유럽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가장 큰 이슈였던 여성해방운동, 즉 페미니즘의 특징도 잘 구현하고 있다.

단편집  <19호실에 가다>를 아우르는 이 글의 부제는 '성, 자유 그리고 불안'이다.

레싱의 단편소설들은 얼핏 보면 출구가 없는 듯 암울해 보이지만, 실상 레싱은 불안증, 정신분열을 포함한 신경쇠약, 즉 '브레이크다운'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자신의 무의식 속 깊은 곳에 있는 적과 대면한 후에야 자신의 치유에 이를 수 있고 이 과정을 겪은 사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남들까지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레싱의 소설은 현실의 문제들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치유의 씨앗을 품고 있다.

도리스 레싱의 1960년대 단편소설: 성, 자유 그리고 불안  <작품해설: 민경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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