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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레카 권 Aug 18. 2021

나의 마지막 기억은 흰구름처럼 포근했으면...

백수린 <여름의 빌라> 책 리뷰

동화처럼 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매미소리에 맞춰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계절.

지나치는 바람의 살랑임이 감사의 여운을 주는 계절, 여름...


손부채질을 하며 걷고 싶은 오솔길 표지 그림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던 책 <여름의 빌라>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에 생각을 포개며 여름의 끝자락을 지나고 있다.



하늘과 마주해서 더욱 파란 여름 바다...책 한 권, 낚시의자 하나면 온종일 힐링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
12p. <시간의 궤적>에서


당신과 내가 주고받는 말들이 아름다운 음악처럼 서로의 마음을 터치하고,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날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꾸밈없이 주고받는 우리의 말들이 담백하지만 고운 선율을 만들어가고,

사랑이라 해도 좋고, 우정이라 해도 좋을 세계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56p. <여름의 빌라>에서


아프지만, 냉정하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이 문장을 눈에 담고 한참 동안 마음이 시렸다.


우리는 그 누구와도 이해받을 권리, 이해해야 할 의무가 없다. 사랑받을 권리, 사랑해 줄 의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사이에 이해와 사랑의 권리와 의무 같은 무언가 존재하기를 바란다.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고 바라면 상심하게 된다.

알면서도 나는 우리 사이에 신기루 같은 무언가가 쌓여가는 기적을 꿈꾼다.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68p. <여름의 빌라>에서  


삶에 가까운 것이 무엇일까...

티 나지 않는 잔잔한 호흡이 떠오른다.


거친 숨은 촛불을 꺼버리지만 

잔잔한 호흡은 흔들어 놓더라도 꺼트리지 않는다.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크나큰 사건이 아니라 잔잔한 일상이 아닐까.



여름, 바다 그리고 책...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71p. <여름의 빌라>에서  


나의 기억이 소멸된다는 것, 누군가의 기억에서 지워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나의 마지막 기억을 선택할 수 있다면...

맑고 푸른 하늘의 흰구름처럼 포근한 기억이면 좋겠다.


너의 마지막 기억을 선택할 수 있다면...

햇살처럼 환한 내 웃음이었으면 좋겠다.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198p. <흑설탕 캔디>에서


나이 드는 건 내 마음의 소녀와 거울 속 외모 간의 괴리감을 견뎌내는 일이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싶은 마음을 못 따라가는 체력을 한탄하는 일이다.


마음의 성장은 더디기만 한데, 몸은 왜 이토록 서둘러 퇴화하는 걸까... 그럼에도 마음속 소녀가 불쑥 다 큰 어른이 되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201p. <흑설탕 캔디>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은 여백이다.

빽빽하게 짠 계획대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면 너무 뻔해서 재미없고 과업 수행하는 로봇 같을 것이다.

정중앙을 향해 쏜 화살이 때로는 모서리에 맞고, 때로는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예측할 수 없기에 설레고 긴장되고 호기심이 생기듯이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기에 하루하루가 새롭고 설렐 수 있겠지.



시간의 흐름에 대해, 삶에 대해,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장소, 책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만으로 한 존재의 마음이 이토록 환하고 충만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행복해졌다.
210p. <아주 잠깐 동안에>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직도 모르겠다.

어떻게 생겨나는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소멸되는지...


그저 사랑하고 사랑받는 시간 동안 '마음이 환하고 충만해진다'는 사실에 공감할 뿐이다.


우리가 매일 서로의 마음을 환하고 충만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가의 커튼이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다줄 수 있는 범선의 돛처럼 부풀던 교실.
나는 무엇이든 선택을 할 때면 그 대가로 미래를 지불해야 하는 줄 몰랐던 날들이 이미 가마득히 멀어졌음을 안다.
265p.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에서


그저 표현이 좋아서 몇 번이나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노을 지는 창밖을 보며 노을보다 빨갛게 상기되던 여고시절,

별이 뜨던 창밖을 함께 보며 가보지 않은 내일의 삶을 공유하던 친구들...


다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친구들이 떠오른다.



더 설레고, 더 감탄하며 살고 싶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온기를 얻고 사랑을 받는 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 해설 <나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서>에서 황예인(문학평론가)-


나는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더 설레고 싶고, 더 감탄하고 싶다.  

나의 세계는 아주 작기에 그저 한 발짝만 떼면 모든 것이 새로울 텐데...

매 순간 한 발짝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는 함께한 시간의 밀도가 아니라
지속되어온 시간의 길이가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 해설 <나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서>에서 황예인(문학평론가)-


때로는 각종 재료를 넉넉히 넣어 끓여낸 부대찌개가 맛있고,

때로는 뼈만 넣고 오랜 시간 고아낸 사골곰탕이 맛있다.


우리의 우정도 그러하지 않을까.

시간의 밀도와 길이 중 어느 것이 중요하다 쉽게 판단 내릴 수 있을까. 그저 제각각 고유의 맛과 향을 낼 뿐...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사랑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는 작가의 믿음이 내 마음을 잔잔히 요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사랑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고,
이 소설들 역시 그런 믿음 속에서 썼을 것이다.

나에게는 성급한 판단을 유보한 채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직시하고
찬찬히 기록하는 것이 사랑의 방식이므로.
<작가의 말>에서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사랑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는 작가의 믿음이 잔잔히 내 마음을 요동하는 이 여름,

살아본 적 없는 파리의 어느 골목 나지막한 모퉁이 건물의 창가 불빛을 상상하며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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