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절실했되 완성은 충동적이었던 동남아시아 배낭여행
우리는 도피처도 없으면서 무작정 도망치고 싶어 하는 서툰 수감자들이었다. 그해 겨울은 어둡고 길었다. 긴 계절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많은 술과 많은 투정이 필요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테이블 앞에 솟아있는 대부분의 얼굴이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증세는 조금씩 달라도 결국 같은 병을 앓았다. 먹고 산다는 일 앞에서 우리는 자주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되곤 했다.
12월의 어느 날, 인사불성이 된 친구를 먼저 택시에 구겨 넣어 보낸 후 역삼역 뒷골목 포장마차에 앉았을 때, 나는 D에게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다음 해 9월에 결혼한다는 선언이었다. 축하한다는 말을 제일 먼저 했다고 믿고 싶지만, 실은 진짜 할 거냐고 되묻고 말았다. D와 그의 애인의 관계가 설익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라는 인간에게 결혼은 이르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내 의견 따위야 당사자들에게 중요할 리가 없겠지만 나로서는 내후년 정도가 적당해 보였다. 고작 일 년 차이라도 해가 바뀐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달력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숫자에 불과하다 무시하려 해도, 삶을 설계하고 뭔가를 선택하고 현재를 납득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돈다고 일 년 전과 똑같은 자리에 있던가. 오히려 삶은 회전을 하며 천천히, 그러나 뚜렷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나선 운동에 가깝지 않던가.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D에겐 두 살이란 나이가 더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엔 어떤 논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 겨울 참 많이도 반복했던 못난 투정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D는 결혼 전에 자신이 꼭 다시 하고 싶었던 일이 오랫동안 여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나의 마음을 쳤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 달 간의 동남아시아 배낭여행을 확정하기 전까지 우리가 가려던 곳은 미국이었다. 자동차를 빌려 두 달 동안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한다는 꿈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었다. 잭 케루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온 더 로드On the road」에서 영감을 얻은 여행이었다. 나와 D가 그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우리는 그들처럼 충동적일 수도 없고 미쳐 돌아가는 영혼이 될 수도 없다는 데 있었다. 우리에겐 이 나라 이 도시에서 도태되지 않고 유지해야 할 생활이 있었다. 조금 (때로는 꽤) 괴롭기는 할지언정 그것에 만족하고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술집에서든 카페에서든 영화관에서든 유심히 지켜보면 우리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생활은 가끔 감옥이 되었고, 담장 너머의 삶도 분명 있을 거라는 희망도 그래서 생겨나곤 했다. 여행은 그 담 너머의 삶을 잠깐이라도 맛볼 수 있는 짧은 가석방이나 다름없었다. 내일 당장 차를 빌려 미국 중부의 황량한 땅을 달린다고 해도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술과 담배, 벤제드린에 찌들고 영혼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인물을 만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흉내는 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얇고 연약한 기대. 시카고에서 루트 66를 따라 달리고도 싶었고, 뉴욕에서 마이애미까지 내려갔다가 멕시코만을 따라 중부로, 서부로 향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직장인이 한 달도 아닌 두 달이나 시간을 내서 여행을 떠난다는 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었다. 최소한 몇 개월의 준비기간은 더 필요했다. 돈도 그랬고, 퇴사나 이직을 하려 해도 그랬다. (남자들에겐 항상 미스터리이기 마련인) 결혼 준비 기간까지 고려했을 때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자원은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D더러 미국 횡단 여행으로 허니문을 떠나라고 할 순 없었다. 나야 상관없었지만 뒷좌석에 앉아있던 D의 피앙세가 어디선가 권총을 구해와 내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우리는 각자 다니고 있는 곳에 휴직서를 내기로 했다. 두 달이라고 말하면 그 어떤 곳이라도 사직서나 내라고 할 게 분명했다. 특히 D는 결혼을 앞둔 몸이었다. 여행을 간답시고 무직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는 기간은 한 달이다. 나의 여행 파트너는 미국 횡단을 하려면 최소한 두 달, 적어도 한 달 반은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엑셀만 죽어라 밟다가 돌아오는 일이 없다면서 말이다. 한편 나로서도 삼사개 월만에 두 달 여행 비용을 모을 수도 없었다. 도전해 볼 만한 시간과 여행지가 서로 맞지 않았다. 우리의 소망은 자주 그래 왔듯 허공에 표류하다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처음으로 함께 배낭여행을 떠나자는 말이 나왔던 날만큼 중요한 날이었다. 우연히 세계지도를 보고 있던 내게 라오스가, 그 서쪽의 태국과 동쪽의 베트남이 눈에 띄었다. 라오스의 경우 한 여행 프로그램의 배경이 된 후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반감이 생기기도 했으나 지도 위에 앞으로 우리가 걸을 긴 선을 그리자 미국 횡단을 꿈꾸며 그었던 선 못지않은 유려한 미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즉시 D에게 내가 본 선에 관해 말했다. 이번엔 그 말이 D의 마음을 쳤다. 그 순간 D의 머릿속에 정확히 어떤 그림이 그려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루트66을 넘어서는 낭만이 그를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의 여행 목적지는 그렇게 단순하게 정해졌다. 시작은 절실했되 완성은 충동적이었다. 우리는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했고, 떠날 필요가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실 그곳이 어디가 되더라도 무관했을지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장기 체류하고 쓴 에세이 『먼 북소리』의 머리말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것도 굵은 글씨로 강조까지 된 채)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 졌던 것이다.” 어느 아침 먼 곳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긴 여행을 떠났다는 그의 동기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작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이 자신의 동기를 곰곰이 되짚어 보면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쉬고 싶든 도망치고 싶든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싶었든 간에 여기서 나는 문득이라는 부사에 밑줄을 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밑줄을 치고 싶었던 부분은 긴 여행이었다. 감히 횟수가 적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한 번도 보름 넘는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대학생의 필수 교양이 돼버린 모양인 어학연수나 워킹 홀리데이를 간 적도 없다. 반면 D는 유럽과 중국을 한 달씩 여행했었고 일 년 간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경험도 있었다. 그런 점이 부러웠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다는 느낌이 어떨지 궁금했다. 장기간 이리저리 떠돌며 내가 어떻게 그 환경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몸과 마음이 변해갈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D와 다섯 번의 짧은 여행을 함께 했었고 서로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지만, 그 기간이 길어져도 그런 행운이 따를지 궁금했다. 어떤 글을 쓰게 될지, 어떤 사진을 찍게 될지도 궁금했다. 그랬다. 온통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태국의 방콕으로 들어갔다가 베트남의 하노이로 나오는 저비용 항공사의 티켓을 끊어 전체 여정이 28일로 확실해졌을 때, 솔직히 원했던 시간보다는 적었지만, 그 크고 작은 궁금증을 일부라도 풀 수 있기를 바랐다. 이번 여행을 떠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D가 결혼 전에 긴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이유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나면 한동안 그럴 기회가 없을 거라는 데 있었다. 당신이 우리의 여행에 동참할수록 차차 그가 어떤 캐릭터인가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그다운 현실적인 이유였다. 사람은 저울의 양팔에 이상과 현실을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흔들릴 때 누군가는 저울의 주인이 청춘에 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철이 안 들었다고 지탄한다. 결국 더 무거운 쪽이 정해진다. 저울이 멈추면, 이번엔 적당히 배분된 이상과 현실이 냄비 속에 들어간다. 우리는 부단히 주걱으로 저어 그 둘을 섞으려 한다. D는 양이 훨씬 많은 현실을 덜어낼 생각이 없지만,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이상이 표면에 둥둥 뜨는 그런 요리와 같다. 내 경우엔 저울의 양팔이 아직 멈추지 않았고, 청춘이라는 말은 과분하여 받지 않으려 하니 철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여행을 통해 그 저울을 한 번 멈춰보겠다는 심산도 아니다. 오히려 계량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었다. 이미 결론이 뻔히 보이는 판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뒤집어보겠다고 말이다.
이런 내 동기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한 가지만 제외하고 말이다. 다들 목적지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미국 횡단을 포기하고 동남아시아로 배낭여행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 좋은 기회를 이상한 곳에 써버린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경험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글을 쓰기에도 그렇고 미국을 횡단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되묻는 이도 있었다. "동남아시아"라는 말에서 단체 여행이나 닷새 정도의 짧은 자유 여행으로 언제든 갈 수 있는 평범한 지역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 배낭여행의 성지는 유럽, 인도, 그도 아니면 남미가 아니던가. 나 역시 그런 편견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막상 내가 목적지를 정하고 나자 주변의 불성실한 편견이 귀찮아졌다. 오죽했으면 이후로는 어디로 가냐는 물음에 그냥 “라오스로 갑니다.”라고만 답했다. 라오스가 워낙 최근 뜨고 있는 여행지인데다가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가득하며 젊은이라면 한 번 가볼 만한 곳으로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거기. 좋아 보이더라. 부럽네.” 그런 대답이 돌아오면 만사 오케이였다. 편견이 싫어 편견을 이용한 꼴이었다. 물론 나와 D가 전체 일정의 반을 라오스에서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내겐 동남아시아의 세 나라를 가로지른다는 관념이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그러나 “왜 라오스이고 동남아시아인가?”라는 결정적인 질문에는 아직 답할 수 없었다. 확실한 답은 하나뿐이었다. 떠나보면 알게 되리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