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는 무슨, 그냥 가는 거지 뭐
동남아시아 여행을 확정 짓고 나자마자 나와 D는 불성실로 일관했다. 떠나보면 알게 되리라는 믿음 하나에 기대어 거의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 준비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보고 희망을 발견해도 좋다. 죽지 않고 갈 곳 다 가보고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보통 둘이 여행을 떠나면 여행 준비를 내 쪽이 도맡는 편인데, 그런 나도 비자, 국가 간 이동, 정말 꼭 봐야 할 몇 가지 관광지밖에 조사하지 않았다. 게다가 대한민국 여권을 들고 떠나보면 알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보다 비자 혜택을 많이 받는 국민도 없다.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무비자로 우리를 환영하고 있으니까. 태국은 물론이거니와 라오스는 십오일, 베트남은 동일 비자로 출국 후 한 달 이내 재입국 금지라는 조건 하에 십사 일 간 비자가 필요 없다. 워낙 다닥다닥 붙어있는 나라들이라 국가 간 이동도 어렵지 않았다.
1. 버스를 탄다.
2. 배를 탄다.
3. 돈이 좀 남았으면 비행기를 탄다.
출발 한 달 전에 그런 정보를 확인하고 나자 “어려울 거 없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고, 그러고 나서는 한 달 간의 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죽도록 일만 했다. 종종 이러다 여행 망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엄습해 오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일상에 충실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직전에 잠깐 다녀온 삿포로에 관한 글을 쓰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조금 더 부지런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쉬웠던 건 정보의 양이 아니라 그곳에서 우리가 취한 마음가짐과 태도였다. 만약 이 글이 다음 여행자를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건 어느 두 남자의 여행 스타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을 편하게 먹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동남아시아 여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목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물론 캐리어보다는 배낭을 들고 가는 편이 낫다. 우리가 여행했던 4월의 날씨를 기준으로 45리터에서 60리터 사이의 배낭이면 차고 남을 것이다. 보조 가방은 가져가되, 현지에서 예쁘고 튼튼하고 싼 걸로 사도 좋겠다.
2. 옷을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다. 반팔티나 바지는 가서 사는 게 저렴하고 짐도 덜 수 있다. 분위기 좋은 식당이나 클럽에 가고 싶다면 여자는 세련된 드레스 한 벌, 남자는 폴로셔츠와 청바지 한 벌씩은 가져가는 게 좋다는 의견이 대세다. 단, 긴팔 옷은 중요하다. 밤에는 갑자기 추워질 수 있고, 강렬한 햇볕에 경미한 화상을 입거나 알레르기가 생길 수도 있으니 돌려 입을 수 있는 두 벌 정도는 필요하다. 물론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는 데 수영복은 필수다.
3. 달러를 가져가 현지에서 환전을 하는 편이 유리하다. 더욱 좋은 방법은 인출 수수료가 적은 해외 사용 가능 체크카드를 만들어 필요할 때마다 ATM기에서 뽑아 쓰는 것이다. 정말 오지가 아니라면 환전소는 없어도 ATM기는 하나 씩 있다.
4. 상비약은 상자를 제거하고 플라스틱 포장 위에 무슨 약인지 메모한 후, 골고루 챙겨가는 게 좋다. 감기약, 진통제, 소화제, 지사제, 알레르기 약 등. 숙취 해소제는 옵션이다. 약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쨌든 선크림도 필수다. 특히 남자들은 선크림 바르기를 끔찍이 싫어하기 마련인데 돌아온 후의 평화를 위해 꼭 바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자면, 얼굴이 하얗게 뜨는 게 싫은 사람은 피부색에 맞는 햇빛 차단제 겸용 BB 크림을 따로 챙기도록 하자. 현지에서도 선크림을 살 수 있지만 너무 백인을 위해 제조된 상품들이다. 여성분들은 이에 관해선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는다.
5. 당신이 사진작가가 아닌 이상 카메라는 최대한 작고 가벼운 게 좋다. 수중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휴대전화 용을 포함해 방수팩도 챙기자. 요즘은 고 프로Go Pro! 같은 작고 동영상 촬영에 특화된 액티브 캠이 인기다. 정말 많은 이들이 몸에 달고 다니며 자신의 여행을 기록한다.
사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소중한 여행을 단지 기억에만 남기긴 아쉬울 것이다. 가벼운 펜과 노트는 여행 작가가 아니라도 가져가야 한다. 메모하거나 일기를 쓰는 습관은 여행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아니면 스마트폰과 연결해 쓸 수 있는 작은 블루투스 키보드를 준비해도 좋겠다.
6. 체력과 인내, 유창한 영어 실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걸 대신할 수 있는 열린 마음.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똑똑히 아는) 수영 실력.
7. 음악과 책.
8. 그 외 여권 사본과 여권용 사진 두 장, 비상용(또는 쇼핑용)으로 사용할 신용카드. 볶은고추장. 여행 가이드북. 여행자 보험.
9. 정말 필요한 정보는 국내 최대 동남아시아 여행 커뮤니티 태사랑(http://thailove.net)에서 얻을 수 있다. 이곳 사용자들이 만든 태국 여러 도시의 지도는 구글 지도마저 우습게 만들 정도로 훌륭하다.
준비가 끝나고 출발을 며칠 남기지 않았을 때, 두렵기도 했다. 오랫동안 이국 땅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원초적인 두려움, 그러니까 “무섭다”고 표현하면 좋을 두려움의 첫 번째 층은 그래도 견딜 만했다. 부딪히는 순간 사라질 가벼운 감정이었으니까. 다음으로 이 여행이 그저 시간낭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두 번째 층은 나약함에서 비롯되었다. 익숙한 일상, 살아내야 할 일상을 뒤로한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당장 한 달 치 월급이 아쉽다는 현실적인 이유부터 돌아온 이후에 쌓여있을 업무나 어쨌든 특혜를 받았다는 심적 부담감 따위에 이르기까지 얽매일 핑계는 한도 끝도 없이 찾을 수 있었다. 세 번째로 딱딱하게 굳은 가슴으로 끝내 이 여행의 미덕을 발견하거나 누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진귀한 보석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사실 난 가장 두려웠다. 여행이란 단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마력이 있고, 때문에 쉽게, 너무도 쉽게 환상과 동경의 왕관을 머리에 쓰곤 한다. 여기엔 숱한 광고와 마케팅, 선배 여행자들의 경험담도 한몫할 것이다. 어떤 여행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는데 많은 (대부분의) 여행은 그저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데 그치곤 한다. 그러나 여행의 권위 아래서 지탄을 받는 건 사람이요, 그의 미달된 자격인 것이다. 나 역시 여행에 대한 환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내가 갈 곳에 실망하기보다 내게 실망할 가능성이 컸다. 어렵사리 얻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초조함이 떠나기 직전까지 나를 고집스럽게 괴롭혔다. 알랭 드 보통이 그의 여행 에세이에 썼듯, 여행 계획을 완벽하게 세우고 여행 가방까지 끝내주게 싸면 무엇하겠는가, 결국 그걸 들고 가는 장본인은 준비가 덜 된 나인 것을.
그리하여 기대를 버리는 연습을 했다. 이곳에서의 삶과 그곳에서 잠깐 누릴 삶에 간극이 있으리라 믿지 않으려 했다. 어쩌면 그런 훈련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여행 준비였을 것이다. 빠트린 물건은 사면되고, 부족한 것들은 단념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것과 대체하거나 교체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한 채 끝까지 끌고 가야 하는 가장 큰 짐이었다.
결국 우리의 여행이 성공적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차차 두고 볼 일이다. 어쩌면 아직도 그 결과를 모르겠다고 고백해야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세계로, 오지로, 꿈꾸던 낙원으로 떠나는 이들의 모험담을 우리는 벅찬 가슴으로 읽는다. 남들보다 중력의 힘을 훨씬 덜 받는 존재인 것처럼 평생 이곳저곳 떠돌아다녀야 하는 이들의 기행을 우리는 먹먹한 가슴으로 읽는다. 나와 D가 가장 부러워해야 할 대상이 바로 그런 여행의 주인공들이었다. 우리는 또래나 한 세대 위의 선배들처럼 삼십 대의 평범한 직장인이자 평범한 시민, 평범한 친구들일 뿐이다. 결국 돌아와야 할 곳이 뻔히 보이는, 긴 무급 휴가를 떠난 운 좋은 녀석들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일탈은 덜 절실했고 덜 낭만적이었으며 덜 모범적이었다. 우리의 여행은 우리 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떠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는 떠나야 했다. 이것은 범상한 여행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