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끄트머리에 떠나는 여행
공항버스에 오르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여행 직전의 불안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 지 오래였다. 어제 막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을 다 읽고 짙은 새벽까지 책의 여운에 사로잡혀 있었다. 케말, 퓌순, 낯선 터키 이름과 그들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가 여행보다 무겁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 버스의 가벼운 진동과 뭉근하게 머리 위까지 익은 피로가 현실인 지금, 그들도 마침내 집착을 포기했다. 소설은 몇 시간 전이 아니라 몇 주 전에 읽은 이야기처럼 아득해졌다. 먹먹함이 사라지자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 안심이 됐다. 나는 창밖으로 흐르는 한강의 풍경에만 집중하며 의자 깊숙이 몸을 맡겼다.
서울에 꽃이 피고 있다는 걸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이 여행은 3월 말에 떠났다.) 산이며 언덕이며 강이며 초봄의 기운이 얇은 실크처럼 덮여있었다. 잠들었던 가지에선 연자두색과 노란색 꽃망울이 아주 천천히 하품을 하는 사람처럼 트이는 중이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제과점 문앞에서 맡을 수 있을 법한 달콤한 기운을 싣고 다녔다. 나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는 한해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민들을 매혹할 것이다. 사람들은 한결 가벼워진 외투를 걸친 채 사랑하는 이와 외출을 할 것이다. 기상 캐스터는 스크린에 펼쳐질 봄꽃 영상에 지지 않으려고 밝은 원색의 옷을 입을 것이고, 그 어떤 정치적 쟁점이나 끔찍한 사고 소식보다 중요하다는 식으로 벚꽃의 개화 시기를 점칠 것이다. 이 도시의 봄이 아름답다는 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점점 짧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 봄은 더 강렬하다.
그 봄을 만나지 못하고 나는 여름이 지배하는 도시로, 건기와 우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도시로 떠난다. 한낮의 기온은 서울보다 이십 도나 더 높고 습기가 몇 겹의 울타리를 쳐 열기가 빠지지 않는 곳. 여름보단 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닌 곳. 평생 사진 몇 장으로만 만나본 탓에 그곳의 이미지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불확실하기만 하다. 이번엔 그곳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마자 얇고 축축한 비닐 막이 피부를 덮고, 귀는 따갑고 코는 맵다.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물건에 관심을 보일 때만 미소를 짓다가 등을 돌리면 다급하게 더 낮은 가격으로 흥정한다. 잔속에 담긴 얼음은 치솟는 수은주 때문에 별 소득없이 물로 돌아가고, 향채가 매 젓가락마다 나를 괴롭힌다. 거대하고 화려한 왕궁은 압도적인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지만 나는 건물의 미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인파 속에서는 어떤가. 카메라를 들고 중요한 장면 하나라도 건져야한다며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가방이 가벼워졌다는 불길함에 화들짝 놀랄지도 모른다. 아마 가끔은 왜 이곳에 왔을까 후회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관적인 상상이 그대로 이뤄진다고 해서 손해인 것만은 아니다. 여행의 성패는 일희일비에 있지 않다. 얄궂은 현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오히려 내가 끊은 비행기 티켓에 붙는 세금과도 같을지 모른다. 상상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나는 지금 공항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엔 영영 놓쳐버릴 봄, 그 전조를 감상하면서.
“못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려고 나왔지.”
나와 D의 친구 Y는 불길한 말로 배웅의 이유를 설명했다. 인천공항철도 개찰구 앞에 나타난 그의 동그란 얼굴엔 전날 과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말까지 예쁘게 했으면 만점이었겠지만, 어쨌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한 시간 반이나 걸려 공항에 와준 그에게 고마웠다. 공항의 한 바에서 그에게 칵테일을 대접하기로 했다. 커다란 야자수가 심어져 있고 대나무 살을 엮어 만든 테이블과 콩 모양 의자가 비치된 곳이었다. 애플 민트가 빽빽하게 들어간 모히토 잔까지 놓이자 세 사람이 함께 태국 어느 휴양지에 온 기분이었다. 흥이 오른 우리는 당장 비행기 표를 끊어줄 테니 Y에게 함께 가자고 부추겼다. 그가 여권을 가지고 있을 리 없으니 미친 짓을 시도하지는 못했지만, 문득 여권이 있었다고 해도 다를 게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우리 세 남자의 얼굴을 보자 들뜬 상태에서도 지울 수 없었던 씁쓸함의 원인을 알았다. 우리는 더 이상 젊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경거망동할 수 없는 시기로 넘어와 있었다. 이십 대는 축제를 즐길 줄 아는 나이고, 삼십 대는 텅 빈 파티장을 정리하는 법을, 즐거움 뒤의 의무를 아는 나이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 「마법사들」에서 의문의 스님은 젊은 주인공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밥을 먹었으면 발우(스님이 공양할 때 쓰는 식기)를 씻어야지요.” 선문답 같은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서른 초반이라는 내 나이에 만족하는 편이다. 체력이 떨어진 만큼 의지는 강해졌고,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예전만큼 괴롭지도 않다. 인내심이 생겼고, 때에 따라 영리하게 걸을 줄도 알고 뛸 줄도 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피로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몸의 피로만은 아니었다. 걷든 뛰든 결국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데서 생기는 근본적인 피로였다. 왜 우리는 나아가야만 하는가? 아니, 질문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그곳으로 나아가야만 하는가? 돈을 벌고 보험에 가입하고 적금을 붓고 대출 이자를 갚고 신용카드 포인트가 쌓일 때나 몇 천 원 할인을 받을 때 기쁨을 느끼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신혼을 즐기다 아이를 낳고 자식에게 한글보다 영어를 먼저 가르치고 학군을 따지고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주입하려다 좌절을 느끼고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보험에 가입하고 더 많은 적금을 붓고 더 많은 대출 이자를 갚는. 아마 앞선 세대의 죽음을 지킬 즈음이 되어서야 나의 차례도 그리 멀지 않았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무사히 이곳으로 왔다는 데 달콤씁쓸한 기쁨을 느낄 것이다. 한숨이 나온다면 그건 차라리 안도의 한숨일 것이다.
D는 곧 결혼할 몸이었지만, Y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어젯밤 술자리에서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을 몽땅 잃어버려 신분증으로 여권을 들고 나왔다고 해도, 나와 D가 돈을 모아 비행기 티켓을 끊어줬다고 해도, 그는 우리와 함께 비행기에 오를 수 없었다. 그건 너무나 명백해서 의심할 여지 없는 계명과도 같았다. 메모리 카드에서 차마 이건 남기지 못하겠다 싶은 우리의 사진 몇 장을 지우며 직면한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이상적이진 않다. 단지 앞으로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여행할 기회는 거의 없으리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 정도의 감성은 남아있었다. 바야흐로 한 시대의 종말이었고, 그래서 나는 조금 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