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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Mar 22. 2022

돈가스와 떡볶이가 함께할 때

익숙한 듯 안 익숙한 조합

진실한 한 끼 Web Edition

외근과 점심 (1)




종이를 보러간다는 말이 아직 좀 어색합니다. 그런데 진짜로 종이를 보러 을지로에 갔습니다. 디자이너가 추천한 새 책의 지종을 직접 보려고요. 문켄 크림… 폴라 러프… 이름만 봐도 비쌀 것 같아 그냥 늘 쓰던 차선책을 택할 수도 있지만, 매장에서 이 종이 회사의 샘플북도 저렴하게 판다고 합니다. 잘은 몰라도 대한민국 책의 50%는 앞뒤에 들어가는 색지로 여기 제품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 견본이라도 구한다면 헛걸음은 아닐 겁니다. ‘쇼룸’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잘 꾸며놓은 매장에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4절 이상의 큰 종이는 계산대까지 들고 가는 도중에 구겨질까 카트에 실어 고이 나른답니다.



회사에서 을지로는 그리 먼 곳이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산책 삼아 걸어서 다녀올 수도 있지요. 다니면서 사진을 찍으면 웹에 올릴 기사 하나 정도 거뜬히 만들어 지고요. 파주 다음으로 큰 인쇄 지구인만큼 자주 들락날락할 건덕지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몸이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브릭스의 인쇄는 대부분 파주에 있는 거래처에 맡깁니다. 종이 발주도 인쇄소에서 해 줍니다. 그래서 을지로는 그냥 때마다 한두 번 가는 곳, 업무로 밀접한 곳이라기보다는 그냥 ‘힙지로’인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금융권 회사들의 마천루가 즐비한 을지로입구를 지나면 하늘이 눈에 띄게 넓어집니다. 을지로3가역에 가까워지면서 타일・도기 특화 거리가 시작되고, 이어서 조명 특화 거리, 금속과 인쇄 골목이 실핏줄처럼 펼쳐집니다. 을지로4가역을 지나면 남쪽으로는 건어물을 파는 중부시장, 북쪽으로는 온갖 포장재와 공방, 베이커리에서 쓰는 도구를 파는 방산시장이 자리 잡고 있지요.



명확한 구역이 나눠져 있는 건 아니지만, 걸으면 분위기가 바뀌니까 다음 구역으로 넘어왔구나 알 수 있습니다. 타일, 페인트, 조명, 포장용기처럼 허름한 상가를 반짝반짝 빛내는 색색의 물건들이 구경할 맛을 나게 합니다. 아, 골목골목 인쇄기와 금형기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카페와 식당 발견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유행 따라 ‘을리단길’ 같은 별명 대신 ‘힙지로’라는 독자적인 형식의 이름을 취했으니 이곳의 개성이 얼마나 남다른지 짐작할 만합니다. 하긴 모든 ‘O리단길’들처럼 이곳은 1~2km 남짓한 거리에 온갖 요식업소가 다 구겨져 들어간 장소가 아닙니다. 대체로 2~30년은 무색할 만큼 오래 자리를 지킨 소규모 사업체가 중심이지요. 젊은이들이 셀카를 찍어 올리는 힙한 장소들이 점점이 포진해 있다고 해서 지게차, 핸드 카트, 오토바이와 삼발이가 좁은 골목을 누비는 속도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누군가 시간을 소비할 때, 누군가는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 무심함과 집중력이 이곳을 ‘힙’하게 만드니, ‘힙지로’라는 유행어도 꽤 적절한 별명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할일을 마치니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제지 회사의 쇼룸은 중부시장 부근이었고, 길을 건너 방산시장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맞습니다. 1946년에 개업한 우래옥이 바로 근처에 있지요. 1952년에 문을 연 설렁탕집 문화옥도 그 옆이고요. 젊은 가게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을지로는 노포의 손맛을 찾아오던 사람들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평양냉면과 도가니탕 대신 제 걸음을 멈춘 오늘의 메뉴는 돈가스였습니다. 곰돈까스. 가게 이름에서 ‘왕 돈까스’들과는 다른 포스가 느껴지지요. 거칠고, 거대하고, 길 들지 않은 튀김옷의 후려치기가 상상됩니다. 사실 제 입맛을 당긴 건 곰돈까스에서 파는 ‘돈까스+떡볶이’라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조합이었지만, 새시 문을 열기로 마음먹은 건 입간판에 쓰인 오자 때문이었습니다. ‘카레’도 아니고 ‘카래’ 돈가스더라고요. 분명 부근 간판 가게에서 만들어 준 걸 텐데, 메뉴 이름을 전달하고 단순한 시안이 오가고 그걸 필름으로 출력해 철판에 붙이는 과정에서 아무도 “카래가 아니라 카레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무심함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그게 을지로 ‘힙’의 원형을 이루는 정신 같아서요.



돈가스도 떡볶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어려서부터 먹게 된다는 점에서도, 학생 신분이든 직장인 신분이든 점심 메뉴로 거리낌 없이 선택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둘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 보입니다. 아마 곰돈까스 사장님도 양대 베스트셀러를 하나로 합치는데 누가 안 좋아하겠느냐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요? 여섯 자리 남짓한 테이블이 끊임없이 채워지는 식당이었는데 의외로 ‘돈까스+떡볶이’를 시키는 사람은 없어서 사장님의 판단이 유효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네요. 그래서 제가 주문했습니다.



떡볶이를 튀김과 같이 먹으면 맛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돈가스 토핑을 파는 떡볶이 집도 있고요. 하지만 이곳에선 떡볶이가 돈가스의 토핑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소스는 우스타 소스에서 떡볶이 소스로 한참 가다가 만 어느 지점에 있더군요. 매콤했습니다. 떡은 물론 돈가스에도 잘 어울렸습니다. 회사 근처 비어할레에서 점심마다 파는 ‘매운 돈가스’와 비슷한 느낌도 났습니다. 양도 8천 원이라는 가격이 서운하지 않을 만큼 많았습니다. 일반적인 왕 돈가스 크기에 떡볶이 반인 분을 더 올렸으니(거기에 공기밥도 나옵니다) 요즘 다이어트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죠.



돈가스 두 점, 떡볶이 두 점, 오뎅 한 점. 규칙적으로 접시를 비웠습니다. 조금 느끼하다 싶으면 소스를 포크로 떠먹거나 깍두기를 먹었고, 조금 맵다 싶으면 마요네즈를 뿌린 양배추 샐러드와 마카로니를 먹었습니다. 밥과 콩나물국을 먹으며 분식을 먹을 때 흔히 오는 더부룩한 상태를 털고 속 전체가 정리되는 느낌도 받았고요. 돈까스 70점, 떡볶이 70점. 평균은 70점이라고 말하고 싶어도 은근히 균형 있게 갖춰진 밑반찬과 저녁까지 든든할 포만감은 70에 70을 더해 140을 말하고 싶게도 합니다.


나름 외근이라고 을지로에 나왔지만, 제가 하는 일은 여기 방산시장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술 노동과는 결이 다릅니다. 저는 손기술이 없습니다. 데이터가 아니라 부피를 지닌 뭔가를 만드는 일을 내내 선망했습니다. 간판도, 포장재도, 금형은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책을 만드는 일은 한다고 인쇄 자체가 제 영역인 건 아닙니다. 그저 이메일로, 전화로 부탁을 드리면 전문가들이 뚝딱 해결해 주실 뿐입니다. 이 동네 사람 모두가 근육이 불거지는 일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 곰 같은 맛과 양은 아무래도 이 거리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먹다 남기는 한이 있어도 양이 부족하진 말라고 축 처진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기 때문입니다.



낡은 건물에 전자음을 조합한 마약 같은 음악을 울리는 카페도 놀랍기는 하지만, 태초부터 여기서 터를 잡았을 것 같은 온갖 자재들, 그것을 다루는 기술들이 을지로를 정말 신비로운 골목으로 만듭니다. 1950년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낡은 상가 건물의 거친 외양과 그 안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클라이언트들의 요구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기술자들. 출렁이는 개발 욕구 앞에 을지로가 어떻게 달라질지는 예상할 수 없으나 당분간은 단단히 박힌 계선주처럼 흔들리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식사를 마치자 당장 우래옥에 들어가시면 어울릴 것 같은 노신사 두 분이 밖에서 주춤주춤하고 계시네요. “돈까스 어때?” “손해 볼 거 없지 뭐.” 손기술만큼이나 주변머리도 없어 막 음식을 먹고 나온 사람의 한 마디를 얹어드리진 못했습니다. 한정식집, 고깃집, 칼국수집, 막국수집이 집중된 그 골목에서 곰 같은 돈가스를 먹기로 한 두 분의 식사가 저처럼 즐거우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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