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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May 02. 2022

걱정까지 발라내세요

인터뷰하러 가기 전에 뼈해장국 한 그릇

진실한 한 끼 Web Edition

외근과 점심 (2)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책과 회사에서 내는 매거진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는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저 그때 찍은 사진만큼은 뇌리에 남아 ‘살을 좀 빼야 하지 않아?’ 훈수를 두고 있지요.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입니다. 사진의 줄기찬 조언도 한 귀로 흘려버린 채 살아왔고요.

요즘은 인터뷰어가 될 일이 많습니다. 딱 한 번 인터뷰이가 됐던 경험은 아무 짝에 소용없지요. 인터뷰 기사를 읽어 본 적도 별로 없고, 도서나 회화나 음악 쪽에 주로 포진된 인터뷰이들의 전문 분야를 썩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서면이든 대면이든 인터뷰를 할 때마다 부담스럽습니다. 질문은 그걸 던지는 사람의 자기 고백이기도 하니까요. 인터뷰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형식적으로 묻는군” 하고 생각할까 매번 겁이 납니다. 확실히 인터뷰어가 되는 것이 인터뷰이가 되는 것보다 더 긴장됩니다.

어느 싱어송라이터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시간이 났습니다. 불안할 시간이 생긴 셈입니다. “질문지는 이미 보내 놓았는데 제대로 진행할 수 있을까?”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까?” 보통 외근을 나가면 일을 끝내고 나서 밥을 먹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온갖 걱정을 좀 죽이며 환기도 할 겸 점심을 먼저 먹기로 했습니다. 싱어송라이터의 작업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응암동 감자국 거리’가 있더라고요. 앙 다물린 등뼈를 해체하는 것만큼 정신 팔기 좋은 일도 없어 보였습니다.



‘응암동 감자국 거리’의 감잣국은 감자탕과 같은 말입니다. 그걸 혼자 먹으면 뼈해장국이 되고요. 사실 ‘응암동 감자국 거리’는 제가 사는 동네에서도 멀지 않습니다. 같은 구니까 같은 동네라고 해도 되겠네요. 하지만 몇 년을 살면서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습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기대감을 부풀리는 거리 이름과 달리 이 골목에는 감자탕집이 네 군데밖에 없습니다. 80년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호황을 이룬 90년대 쯤에는 열세 군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3분의 2 넘게 폐업을 한 셈이지요. 대로변에 먹자골목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지만, 꼭 사라진 문화재의 터를 알리는 표석처럼 보였습니다.

감자탕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감자탕을 처음 먹은 건 대학에 다닐 때였습니다. 캠퍼스 앞에서 24시간 영업하던 몇 안 되는 식당 중 한 곳이었지요. 언제든 찾아가 하루를 마감함과 동시에 숙취로 날아갈 다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정겨운 곳이었지요. 등뼈에서 살을 발라 먹으려고 애쓰는 노력도 번거롭지 않습니다. 솔직히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등골까지 빼먹는다”는 속담을 문자 그대로 실천한다는 게 돼지에겐 참 미안한 일이지만요.



살아남은 네 곳의 감자탕집에서 어떤 곳을 고를까? 규모나 이름도 제각각. ‘원조’라는 아우라를 풍기기에는 비교 대상이 너무 적네요. 평소 같았으면 가장 작거나 가장 낡은 곳을 찾아 들어갔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점심시간이라 남들 다 여럿이 와서 한 솥을 시킬 텐데, 혼자 ‘뼈해장국’으로 1인 점심 메뉴를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식당이 클수록 빈자리도 많을 거라는 계산과 함께 2층짜리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갈 때만 해도 반은 남아 있던 빈자리가 끊임없이 채워졌습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들어간 곳은 '불맛감자국'이었습니다


처음 감자탕을 먹을 때는 살코기가 잔뜩 붙은 뼈에 국물도 걸쭉해서 꽤나 호사스러운 음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양돈업이 성장하고 고기 대부분을 일본으로 수출하던 시기, 남아도는 돼지 등뼈가 식당가로 흘러들어 음식 재료가 된 게 감자탕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서민적인, 가난한 시절에 가난한 사람들이 탄생시킨 음식인 것이지요.

지금이야 살이 넉넉하게 붙어 있지만, 그때는 정말 뼈밖에 없었다고 해요. 사골처럼 골수로는 국물을 내고, 뼈 사이에 숨은 살코기가 단백질의 전부였지요. 흥미롭게도 여기 ‘응암동 감자국 거리’가 인기를 끈 건 그 와중에도 이 동네 감자탕집들이 살점을 많이 붙여 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심도 좋고 사업 수완도 갖춘 곳이었던 거지요.

손님들이 점심부터 소주로 반주를 한다는 게 식당 인심의 척도가 될 리는 없지만, 이상하게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밤 혹은 새벽부터 일을 나왔다가 오전에 마치고 귀가하려는 사람들은 한낮에 술잔을 부딪치며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눕니다. 그래, 감자탕집은 바로 이런 곳이지, 창밖에 해가 떠 있든 달이 떠 있는 찰랑거리는 술잔 안에 오롯이 담아 마시는 곳이야.



괜히 흐뭇하면서도 마음 한편은 여전히 좌불안석,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저는 입구 쪽 테이블이 제가 혼자 앉은 4인 테이블보다 묘하게 작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마침 주인 분이 밑반찬을 가져다주셔서 여쭈어 보았지요. 손님이 많은데 자리를 좀 작은 쪽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사장님은 흔쾌히 답하셨습니다.

“괜찮아요. 그냥 편하게 드세요.”

요즘이야 감자탕에서 살코기 양은 따질 계제가 아니라 승부처는 국물맛과 고기맛에 있지만, 어쨌든 편하게 드시라는 사장님의 말씀은 제 노파심을 단번에 해결해 주며 사그라들던 식욕도 되살려 주었습니다. 뚝배기에 팔팔 끓여 나온 뼈해장국의 국물은 과연 이 거리의 역사만큼이나 걸더군요.

문득 이 시대의 인심이라는 건 양이 아니라 손님의 처지를 헤아리는 마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대림시장과 대림골목시장을 돌았습니다. ‘응암동 감자국 거리’의 시초도 여기 시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시장은 건물형 재래시장이고, 대림골목시장은 그 앞에 일렬로 쭉 상가가 늘어선, 이름 그대로 골목형 재래시장입니다. 제가 갔을 땐 골목 쪽에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조금 일찍 장을 보러 온 사람, 그저 구경하는 사람, 구경하는 김에 뭘 사가게 된 사람, 인파가 끊이지 않았지요.



카메라를 메고 돌아다니는 저를 시장 사람들은 거의 의식하지 않습니다. 뭔가를 사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일까요? 홀가분하게 이곳저곳 기웃거립니다. 잠시 후에 있을 인터뷰 걱정도 뒤로 밀어두었습니다. 아니, 그건 뼈해장국을 먹을 때 벌써 놓아두고 온 것도 같습니다.

감자탕집 사장님은 제 식사를 두고 편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거지만, 오전 내내 부담을 느끼던 저는 그 말을 앞으로 해야 할 인터뷰에 응용하기로 했습니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일을 보라는 격려가 아니었을까 믿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음을 물렁물렁하게 놓아두는 일은 어찌나 어려운지요. 조금 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사는 곳과 엇비슷한 풍경인데 어쩐지 생경하더라고요. 마치 처음 오는 동네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들떠 이젠 정말 인터뷰 걱정 따위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편하게 드세요.”

식사 말고도 많은 일들을 그런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겠지요. 사실 그런 대답을 기대하고 사장님에게 자리를 옮길까 여쭈어 본 것은 아니지만, 지나고 보니 묻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곧 인터뷰이에게 할 질문도 그렇게 썩 괜찮은 물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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