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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Nov 12. 2020

괜찮아, 고등어나 먹자

제주에서 먹은 그냥 생선구이

첫 책이 나왔을 때 제주에 갔다. 책을 냈으니 휴가를 즐기자는 건 아니었고, 섬 곳곳의 작은 서점들에 내 책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홍보의 일환이었던 셈인데, 말할 때 느낌표 서너 개는 붙여야 할 만큼 쑥스러운 만남의 연속이었다. 


당초 나와 아내의 계획은 이러했다. 일단 책 자체가 가족과 함께한 여행을 다룬 내용이었다. 서점 주인들이 우리 가족을 직접 보고 나서 책을 읽으면 머릿속에 주인공들의 말과 행동이 더 생생하게 떠오르며 흥미를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또, 나와 아내 둘 다 제주에 가지 않은 지 이십 년이었다. 몇 년 사이 급변했다는 제주의 매력을 익히 들었던 바, 가보고 싶었던 식당과 카페도 두루두루 다니면 좋을 것 같았다. 일과 여행, 일거양득이지.



삼박사일 동안 514km나 달릴 거라고 예상했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514km를 다니면서 내렸다 탔다 들어갔다 나왔다 구경했다 계산했다 반복한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이동하는 게 더 힘든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더 힘든지 모를 일이기도 했다. 아마 제일 고단했던 건 아이였을 거다. 나와 아내는 책과 책방을 구경하는 즐거움이라도 있었으니까. 다행히 어떤 주인들은 우리가 서가를 구경하는 동안 아이와 놀아주기도 했다. 아이는 누군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게 마냥 기뻤고, 주인과 아이 사이에 다정한 말과 기특한 말이 오가는 걸 들을 때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함께 찾아왔다.


하지만 이미 여정 중에 결과를 알고 있다는 듯 조금씩 회의가 들었다. 일도 아니고 여행도 아닌 이 행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다고 내 책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늘어날까?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에서 벌써 여름이 엿보이던 5월의 제주를 만났고, 그것 말고 다른 의미는 없었다. 실제로 내 책이 서가에 놓여 사람들을 만날 수 있던 서점은 두 곳뿐이었다. 원래 알던 한 곳, 주인이 없어 책만 살포시 올려두고 온 한 곳. 아마 그때는 어떤 한 끼보다 몇 캔의 맥주가 더 필요했던 것 같다. 





서귀포시 화순리에 있는, 중고 서적도 파는 어느 카페에 기별을 하고 나오자 한낮이었다. 평원 아래 잠들어 있던 거인이 주먹으로 땅을 뚫고 나오려는 것처럼 불쑥 솟은 산방산, 그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초현실적으로 가까워 보인다는 점 말고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그날 햇살엔 사람을 금방 허기지게 하는 기운이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가려던 참에 아담한 식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광식당, 파란 간판에 딱히 분명한 의미를 길어낼 수 없는 이름 하나 달린 곳이었다. 마침 바로 옆에 농협이 있었고, 은행 일 보러 온 사람 말고도 주변 식당들이 다 같이 애용하는 듯한 은행 주차장에 차를 집어넣었다. 이젠 당장 뭐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될 기분이었다.


여정의 중간쯤이었다. 서점과 서점 사이에서 맛과 분위기로 이름난 식당과 카페를 꼬박꼬박 찾아가던 동력이 무뎌지는 반환점. 아내도 남편의 책이 어떤 쓸모를 만들어내진 못하겠다는 현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우리 둘 다 지도 앱 평점이나 블로그 리뷰로는 가질 수 없는 확신을 느끼고 있었다. 거리에서 눈과 발에만 의지해 밥집을 찾다 보면, 그게 역사든 내공이든 간에 몇 사람 잘 먹이는 일 정도 눈 감고도 해낼 수 있는 주인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식당이 있다. 그건 벽에 걸린 간판, 창문으로 드러나는 실내의 조도, 가게 바깥에 내어놓은 물건, 벽에 발린 페인트나 손잡이에 남아 있는 세월의 흔적 따위로 가늠되는 일이다.


서광식당의 반쯤 열린 미닫이문을 넘어서자 기역 자 주방과 손님 앉는 테이블이 몇 평 남짓한 공간 안에 엉켜 있었다. 바깥 화장실로 이어진 긴 통로는 식자재와 생활 용품을 쌓아두는 창고를 겸했다. 주판 알 같은 플라스틱 발이 쳐진 통로 건너편에는 바깥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한여름 한낮에 홀로 방안에 남겨진 것처럼 세상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부모님 연배로 보였고, 아이는 바지 주머니에서 장난감을 꺼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갈치조림과 고등어구이를 주문했다.



아이한테 있는 기특한 점 중 하나가 생선을 잘 먹는다는 거다. 제주의 해물이나 흑돼지는 워낙 명성이 자자하지만, 그거 다 가져다 놔도 아이가 먹을 일은 없었다. 날것은 날것대로 못 먹이고, 고기는 조금이라도 오래 씹어야 하는 육질이라면 죄다 뱉어 버리니 결국 메인 요리는 부모의 즐거움일 뿐이요, 아이가 찾는 건 맨밥에 미역국, 구운 김 정도였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바깥에서 아이에게 제대로 한 끼를 먹이고자 할 때 생선구이를 주로 찾았다.


밥때가 지난 시각이라 주방의 모든 게 멈춰 있었다. 화구에 다시 불이 들어오고, 쌀밥과 밑반찬이 새로 담겼다. 조금 오래 기다린다는 데서 믿음이 생겼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생선조림이나 구이를 먹는 날은 으레 평소보다 밥상 차려지는 속도가 느린 날이라고 생각했다. 양념에 잠겨 있던 얇고 푸른 비늘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신문지로 덮은 프라이팬 속에서 흰살이 충분히 부풀어오르기를 기다리며 가스레인지 앞을 얼쩡거리고는 했다. 그렇게 밥상 위에 오른 생선의 고소한 맛과 콤콤함, 감칠맛은 기다림을 보상하고 남았다. 



사실 이젠 집에서 생선을 통째로 구워 먹을 일이 많지 않다. 살만 발라져 나오는 냉동 가자미에 부침가루를 묻혀 튀기듯 구워 먹거나 전자레인지에 1분만 돌리면 거의 바로 구운 것처럼 환생하는 인스턴트 고등어를 먹는다. 사방으로 튀는 기름 걱정, 집안에 꽉 차서 눌러앉는 냄새 걱정 없는 이 편이 좋다. 게다가 나는 누구에게도 생선 잘 굽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화력 조절은 언제 어떻게 하는지, 어종마다 굽는 방식이 다르진 않은지, 껍질이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워지는 조화는 어떻게 부리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속살이 설익지도 쇠 익지도 않은 딱 좋은 상태를 어떤 식으로 알아낼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그래서 주저한다. 지금껏 해 왔던 다른 요리처럼 생선도 혼자 태워 먹으면서 배우면 그만이지 않을까? 왜 생선 앞에선 아직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까?


평일 점심에 생선구이를 먹으면 든든하다. 오늘 괜찮은 한끼를 먹었다고 으쓱해진다. 지금 사무실 건물 지하엔 김치찌개를 시키면 생선 한 마리를 구워주는 추어탕 집이 있는데, 미꾸라지 고는 실력 만큼이나 생선 굽는 실력도 출중하시다. 바로 이런 곳들이 있어서 그렇다. 나는 잘 구워진 생선 한 마리를 받아먹는 위치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기름을 먹어 반들반들해진 신문지를 경외심으로 들춰보던 어린 시절, 생선 요리는 완벽히 어머니의 영역이었다. 그 시절과 완전히 작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밖에서 먹는 음식 중에선 김치찌개도 된장찌개도 아닌 생선구이가 ‘집밥’이라고 느껴진다. 결혼을 하고 가정까지 꾸린 사람이 생선 한 마리 제대로 굽지 못한다니. 내 자식이 아빠가 굽는 생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풍경을 만들지 못하다니.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기분이다.



실리적인 면에서 완벽히 실패였던 첫 책과 제주 여행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쓴 작품에 확신이 없었고, 이걸 누군가의 코앞에 들이밀면 마지못해 알아주리라는 순진한 낙관을 품고 있었다.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며, 독자에 앞서 누구보다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때마다 우리 가족이 제주에서 보았던 풍경, 바람을 따라 걸었던 돌담길, 강렬한 해초 냄새와 함께 발밑에 엎드리던 물결, 호기심에 차 돌아다녔던 숙소의 이곳저곳을 떠올렸다. 그 한가운데 우연히 들어갔던 식당의 생선구이가 제일 많이 떠올랐다. 일 년 넘게 흐른 지금도 식당 뒤편으로 쏟아지던 5월의 볕이 선명하다. 아마도 모든 결말을 이미 알고 있던 그때, 나는 자구책을 찾았던 것 같다. 생선구이가 어떤 식으로든 나를 위로해 줄 거라고 믿었나 보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도 아이에게 생선구이 한 마리 사준 건 그나마 잘한 일이었다고 나에게 말하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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