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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Oct 22. 2020

토마토를 잔뜩 넣어주세요

스튜라는 걸 처음으로 먹었던 그날

토마토 스튜를 만든다는 아내의 말에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때는 결혼 전이었고, 우리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마트든 카트를 끌고 다니기만 해도 즐거워서 우리는 딱히 살 게 없어도 산책 삼아 마트에 들어가곤 했다. 캔이나 병에 붙은 라벨 한 장, 제품을 소개하는 특유의 서체와 처음 보는 로고 하나조차 이국적인 향취를 풍겼다. 차가운 수증기로 신비로움을 더한 고향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채소, 돼지고기 가격표를 잘못 붙인 것 같은 소고기 덩이, 내게는 썩 맞지 않았으나 아내는 무척 좋아하던 각양각색의 유제품들이 자신을 구매하지는 않아도 좋으니 얼굴이나 한 번 보자며 거의 매일 우리를 부르곤 했다.



토마토 스튜를 만들기로 한 날 아내는 홀토마토와 토마토 페이스트 통조림을 샀다. 왜 토마토가 떡하니 그려진 통조림을 두 개나 사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사실 두 가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면서 불안했던 것은 언젠가 어느 라면 가게에서 본 ‘토마토 라면’이라는 메뉴 때문이었다. 내게 훌륭한 라면은 면이 꼬들꼬들하고 국물은 퍽 매콤하면서 찬밥을 말면 단맛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반면 나의 빈곤한 상상력이 펼친 식탁보 위에서 토마토 라면은 토마토케첩을 넣은 무엇, 혹은 시중에서 페트병에 담아 파는 토마토 주스 같은 무엇이었다. 그런데 토마토 스튜라니, 내가 스튜라는 음식을 먹어본 적은 있던가? 아내는 각설탕 모양으로 잘린 소고기가 저렴하다고 추켜세운 다음, 한국 마트에서는 ‘허브 코너’ 안에나 모여 있을 희한한 이름의 채소들을 카트에 담았다. 나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아내는 예고한 대로 토마토 스튜를 끓였다. 내 입맛에 맞춰 청양고추보다 맵다는 남미 어딘가의 고추까지 넣은 걸쭉한 국물 요리였다. 그날 이후 아내가 오늘은 뭘 먹겠냐고 몇 가지 선택지를 주면 난 토마토 스튜를 택했다. 선택지에 토마토 스튜가 없는 날에도 토마토 스튜를 택했다. 어떤 음식이 서른 중반이 다 된 사람의 마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토마토를 가장 많이 먹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6세기에 남미로부터 토마토가 처음 들어왔을 땐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감히 이 새빨간 열매를 먹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럽에 자생하던 맨드레이크, 벨라돈나풀 같은 여타 가지과 식물들처럼 토마토에도 독성이 있다 여겼고,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추방시킨 선악과가 바로 토마토였다는 풍문까지 돌았기 때문이다. 나폴리처럼 가난한 남부 도시에서만 토마토를 재배해 먹었다. 오히려 토마토와 고추 같은 외래 작물을 식용으로 먼저 받아들인 건 기독교적 세계관과 무관하던 동남아시아, 중국을 비롯한 동양이었다.


당시의 유럽인들, 나중엔 미국인들까지(토마토는 미국에서도 찬밥 신세였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만, 알다시피 토마토는 효능이 엄청나게 많다. 노화방지, 특정 부위에의 항암 작용, 거기다 기가 막힌 숙취 해소 효과까지. 채소라고는 하지만 과일처럼 날것으로 먹는 게 더 익숙한 이 영약은 칼과 불로 파괴할 때 더 훌륭한 영양소가 된다. 요리책의 저자들도 생 토마토로 조리하는 번거로움 대신 열처리를 한 갖가지 토마토 통조림을 쓰라고 권한다. 친척뻘인 토마토케첩이 그가 조연으로 등판하는 패스트푸드와 함께 사람을 병들게 한다는 비난을 받는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나와 아내는 장을 볼 때 습관적으로 토마토소스를 부엌 재고에 채워 넣는다. 기나긴 유통기한은 병입 처리된 황금의 식재료가 과연 건강에 유익할 것인가 의문이 들게 하지만, 결국 이 재료들은 냉장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천천히 줄어드는 우리 집 된장과 다르지 않은 존재다. 매일 필요하진 않지만 언제 필요할지 모르거니와 없으면 몹시 아쉬울 그런 존재.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먹어야만 하는 날이 있듯, 우리에겐, 아니, 나에겐 토마토 스튜를 먹어 줘야 하는 그런 날이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나의 태생, 살아온 환경과 전혀 접점이 없는 이 외래 음식이 어떤 이유로 나의 일상식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일반적인 스튜 조리법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 먹기 좋은 모양으로 자른 고기를 표면이 갈색으로 익을 때까지 버터에 볶는다.


아내는 버터대신 올리브유에 고기를 익힌다. 프랑스 문학이냐 이탈리아 문학이냐 묻는다면 프랑스를 택하겠지만(움베르트 에코와 이탈로 칼비노 말고는 읽어본 작가도 몇 없다), 프랑스 음식이냐 이탈리아 음식이냐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이탈리아를 택할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프랑스 음식은 버터와, 이탈리아 음식은 올리브유와 연결되어 있으니 나도 올리브유로 고기를 볶는 게 좋다. 그건 내가 요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책이나 블로그에서 보는 레시피는 충직하면서도 현실적인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다분히 상대적인 안내자이다. 그래서 고기를 꼭 버터에 볶아야 그 음식을 ‘스튜’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내가 먹는 토마토 스튜는 사실 스튜가 아닌 셈이 된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토마토 찌개라고 해야 하나? 별로 식욕이 돋는 이름은 아닌가?


무엇보다 나는 정통 토마토 스튜를 먹어 본 적이 없다. 정통이 어느 나라인지도 잘 모른다. 토마토를 때려 넣으니 이탈리아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게다가 아내의 조리법은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것이지만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고 한다. 우선 구할 수 있는 재료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아내가 만들어 준 첫 번째 토마토 스튜는 캐나다산 고기와 채소, 토마토소스(거기서도 이탈리아 수입산이었지만)를 썼다. 미대륙산 재료로 만든 한국인의 이탈리아식 토마토 스튜라. 세 대륙을 아우르는 이 음식은, 혼종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게 아닐까?


실제로 아내의 토마토 스튜를 처음 먹었을 때 익숙한 맛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질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데 놀랐다. 어렸을 때부터 즐겨 먹었던 음식 같았다. 열정적인 고추씨의 매콤함, 토마토 특유의 감칠맛과 신맛, 거기에 혀끝에 남는 은근한 단맛까지. 신김치를 넣은 김치찌개, 칼칼하면서 구수한 차돌 된장찌개, 햄과 라면, 소세지를 황금 비율의 양념장으로 졸이는 부대찌개와 견주어도 손색 없었다. 나는 토마토 가공품의 주 제조국이 이탈리아이며 이들이 국내에 들어온 지 100년도 안 됐다는 이유만으로도 한식과 토마토소스가 양립할 수 없다는 상식을 고수하기로 하지만, 내심 김치찌개나 라면을 끓일 때도 토마토소스를 넣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토마토 스튜가 나에게 일상식이 된 것은 물론 아내의 덕이다. 낯선 환경 속에서 우리는 정서적으로 더 결합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내 입맛에 맞춰 정성을 다한 아내의 요리가 나에게 깊이 아로새겨진 것이다. 어떤 음식에 특별한 의미가 생겨나는 과정엔 그 맛만큼이나 어떤 상황에서 그 음식을 먹었는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꾸어 말하면 왜 평범한 식사가 진실한 한 끼로 기억되는지 그 이유를 되짚다 보면 그 시점이 놓여 있는 삶의 맥락을 이해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자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잊는다. 음식은 감각의 엔진이고, 그래서 항상 머리보다 빠르다. 음식이 불러일으키는 정서나 감정이 더 오래, 더 강렬하게 기억되기에 그 근원을 좇으며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희미하게나마 돌이킬 수 있다.


닳고 달은 주방기구와 코일이 벌겋게 달아오르던 이국적인 전기 레인지. 내 평생 한 번도 집어 본 적 없는 토마토가 그려진 통조림 두 캔. 거의 우리만의 섬처럼 보이던 타인의 부엌. 몬트리올에 가기 전 나는 지금껏 살아오던 방식이 아주 엉망진창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몬트리올에서 몇 주를 지내며 나는 그 생각을 잠시 잊었고, 지금부터는 종전과 다른 방식으로 삶이 나아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까지 품었다. 그리고 그건 얼마간 현실이 되었다. 바로 그 시점에 나는 아내의 토마토 스튜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양식이라고 하기에도, 한식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내겐 새로운 형식의 음식을.


이탈리아 음식은 좋다면서 이탈리아 문학은 잘 모르겠다고 쓴 점이 마음에 걸려 움베르트 에코가 어느 책의 서문에 쓴 글을 빌려 본다. “풍경과 언어, 민족 집단의 이런 다양성은 무엇보다 음식에 그대로 드러난다. 외국에서 맛보는 이탈리아 음식은 그 맛과 상관없이 진정한 이탈리아 음식이 아니다. (…) 본고장을 벗어난 음식은 숙명적으로 새로운 지역의 기호에 맞춰 재탄생한다. (…) 고유한 그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에코의 말이 맞다. 아내의 토마토 스튜는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레시피로 끓였지만 이탈리아 음식은 아니었다. 그 스튜는 이탈리아 고유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대신 우리 부부의 고유한 음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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