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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Oct 15. 2020

반찬은 다 차려두었어

나를 생각하는 백반 한 차림

무더운 여름이라도 메뉴판에서 ‘백반’이라는 글자를 읽으면 속이 시원해진다. 몸의 욕구를 탐색하는 수고도 모자라 그것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매일의 과제가 그 단어 하나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뭘 먹지?” 자리에 앉아 다른 메뉴를 고르기라도 할 듯 잠시 시간을 끈다. 하지만 점원도 알고 나도 안다. 우리의 주문은 오늘도 “백반 하나요.”




편집과 책 디자인. 내가 하는 일은 점심시간이 불규칙할 수밖에 없는 직종이다. 하지만 그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전 열한 시에 서촌의 유명 중국집(사실 그리 유명하진 않은데 항상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먹어 보면 이렇게 서 있을 만하다는 걸 안다)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오후 세 시에 이제는 편의점에라도 좀 가 볼까 뭉그적거리며 일어서기도 한다. 되도록 수백 명의 회사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정오는 피하려 한다. 그러니 가장 이상적인 시간대는 오후 한 시 경이다. 이때, 배부른 직장인들은 카페로 몰려갔고 식당 아줌마는 한숨을 돌린다. 그리고 ‘백반 타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각이기도 하다.


서촌을 거쳐 광화문 쪽 지금 건물로 옮겨오기 전엔 사무실이 성수동에 있었다. 그 몇 년 동안 성수동에서 인테리어와 식단에서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식당과 카페가 하나둘 늘어가는 변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관찰했다. 한 곳이 망해서 사라지면 주변으로 두세 곳이 늘어나는 끈질긴 도전 앞에 숙연하기도 했다. 물론 나도 사무실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을 때는 인기 있는 식당을 찾아다니며 유명세의 덕을 보았다.



그러나 혼자 밥을 먹는 날에는 유행으로 치면 변두리에 있다고 할 어느 고깃집을 찾았다. 거기선 점심시간에 인원수대로 알아서 상을 차려주는 백반을 팔았다. 붐비는 시간대만 지나면 혼자라도 반갑게 맞이해 주던 그 고깃집의 점심 밥상은 마지막으로 갔을 때도 오천오백 원을 유지하고 있었다. 메뉴를 고를 필요가 없어서 마음이 편했고, 가끔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고기를 굽는데 그가 첫 쌈을 싸기 전에 내 밥그릇을 비우고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고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 젊은 창업자들이 미처 손 뻗지 못한 골목을 찾아다니며 남은 점심시간을 보냈다.


이 고깃집 백반의 주반찬으로는 제육볶음이나 닭볶음탕, 생선구이나 조림, 오징어볶음 따위가 돌아가며 등극했다. (삼겹살과 소갈빗살을 파는 고깃집인데 백반에서 가장 맛있는 반찬은 닭볶음탕이었다.) 가끔 카레나 짜장밥, 비빔밥이 별미로 나오기도 했다. 거기에 항상 국 한 사발과 곁들임 찬 네다섯 가지가 나왔으니 말 그대로 ‘6찬 밥상’이었다. 콩나물 무침, 어묵이나 멸치 볶음, 된장에 무친 고추, 오이와 당근과 쌈 채소, 김치와 쌈장 등은 고기를 시켜 먹을 때 내어주는 밑반찬이긴 했지만 맛이 제법 괜찮았고, 식당 입장에서도 식재료의 회전을 위해서나 실속 면에서나 영리하고 알뜰한 식단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곳은 몰라도 고깃집에서 파는 백반에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생기고 말았다. 성의를 보인 백반이라 하면 으레 여섯 가지 반찬 정도는 올라오는 상차림이라고.



그런데 왜 하필 ‘6찬’인지는 먹으면서도 잘 몰랐다. 그러고 보면 내가 즐겨 먹는 편의점 도시락 중에도 ‘6찬 도시락’이라는 게 있었다. 조선 시대엔 뚜껑 있는 그릇에 담은 반찬을 ‘첩’이라 했는데, 상차림을 3첩, 5첩, 7첩 순으로 올려야 한다고 정해두었다.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한 집에선 주로 5첩 차림을 먹었다. 첩수에 국이나 찌개, 김치는 넣지 않았으니까 6찬은 우리 식구 그럭저럭 잘 먹고 산다는 반증인 5첩에 김치나 국을 더해 굳어진 숫자가 아닐지, 사흘 연달아 고깃집으로 백반을 먹으러 가던 어떤 날에 막연한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여섯 가지 반찬을 놓고 밥을 먹고 있으면 내가 이 한 끼는 제대로 먹고 있구나 하는 든든함이 밀려왔다. 반찬 수가 여기서 한두 가지 더 빠질지언정 백반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었다. 단일 메뉴보다 오백 원이라도 저렴하고 차리는 속도가 몹시 빠르다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집 밖에서도 제대로 먹고 있구나 하는 안심을 주는 것.



여러 명이 함께 밥을 먹을 때 백반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밑반찬을 서로 나누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성수동에 생긴 멋부린 식당들은 반찬 수가 적어도 각자 먹을 수 있는 정갈한 일인 상을 차려주곤 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는 식당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위생이든 정성이든 연연할 일이 없었다. 백반도 혼자 먹으면 누구와 나눌 것 없는 일인 상이니까. 혼자 왔다고 반찬 한두 가지를 빼고 주는 곳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으니까.


누군가 ‘요리’와 ‘조리’는 다르다고 말했다. 물론 자신이 요리를 한다는 자부심이 있던 사람의 말이다. 하지만 생업을 하다가 한 시간 짬을 내어 먹는 밥이 언제나 ‘요리’일 수는 없다. 백반은 불가피하게 ‘조리’다. 일상성과 반복성, 연속성을 피할 수 없다. 나는 바싹 마른 어묵 쪼가리가 껴 있다 해도 이 끝없는 권태 속에서 가능한 한 끼는 제대로 챙겨 먹자는 백반의 마음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집밥이라 하더라도 여섯 가지 반찬을 꼬박 챙겨 먹는 집을 더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그 방향이 옳은 것 같다. 외식과 배달 음식이 보편화됐고, 음식 낭비를 막기 위해서라도 반찬 수를 줄이자는 (대신 제대로 만들자는) 것이 요즘의 추세다. 흔히 머릿속에 떠올리는 집밥은 이제 백반집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식당 아주머니들의 수고와 피로에 든든한 한 끼를 위탁해야 하는 시대다.





사무실이 서촌에 있을 때, 가장 아쉬웠던 게 백반이다. 서촌의 첫 번째 연관 검색어가 ‘서촌 맛집’인 현실과는 무관하게 이 동네에서 백반집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백반이 먹고 싶을 땐 대로를 건너 광화문 쪽, 그러니까 지금 사무실이 있는 오피스 지역으로 오곤 했다. 대부분의 건물 지하 1층에는 식당 아케이드가 있고, 그곳에 찾아둔 백반집이 몇 군데 있었다. 이런저런 찌개와 덮밥, 볶음밥 등을 파는 간이식당들이다. 지하 아케이드에도 유명세를 떨치며 손님 줄 세우는 집이 있지만, 간이식당엔 줄을 서기 싫거나 줄을 서다 지친 사람들이 흘러들어 적당히 자리를 채우는 데 그친다. 혹시 만석이라도 간판만 다른 비슷한 식당이 모퉁이 돌아, 또는 옆 건물 지하 아케이드 안에 있기 때문이다. 대체 가능하다는 점이 서글픈 것인지 대체 가능한 곳도 개의치 않는 마음이 서글픈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여기서도 혼자 앉아 묵묵히 수저만 뜨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반가움만 기억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네 백반집엔 내가 가던 성수동의 고깃집과는 다른 공기가 흐른다. 성수동 고깃집에는 활기가 있었다. 사장 아주머니가 한쪽에서 그날 저녁 장사에 쓸 채소를 다듬는 동안 두 아주머니는 주방에서 상을 차리고 다른 두 아주머니는 홀에서 음식을 날랐다. “여기 한 분 닭도리탕 안 나왔어!” 당연히 받아야 할 반찬을 챙겨주는 그 말에 나는 왜 빤히 감격했을까. 그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고, 시계 부품처럼 손발이 딱딱 맞는 중에도 친밀한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그것이 여섯 가지나 되는 반찬 만큼이나 손님의 안쪽 어딘가를 든든하게 해 주었다. 난 어쩐지 그 아주머니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가 후딱 그릇을 비우고 일어나는 우리를 안쓰럽게 여긴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평일 점심 시간은 누구나 인정하는 휴게 시간이지만, 어쩐지 그 휴식은 자신보다는 업무의 연속을 위한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나를 생각해서 백반집을 찾는다. 반찬 수가 여섯이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고, 여섯이 넘는다고 섣불리 감격하지 않는다. 어제 늦은 저녁에, 오늘 이른 아침에 이 반찬들을 무치고 버무리고 졸이고 볶았을 주방 안의 누군가를 상상하며 내가 오늘도 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만 뒤돌아본다. 나는 너무 자주 허튼 끼니로 나 자신에게 벌을 주었고, 그걸 은근히 즐겨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은 주방에서 깜빡한 내 제육볶음을 챙겨주던 식당이 그립다. 내가 백반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가격도 속도도 아닌 어느 고깃집의 활기찬 외침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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