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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Oct 08. 2020

시절과 함께 보낸 한 끼

콩나물 비빔밥, 3,500원

나는 때때로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을 보면 슬퍼졌다. 홀로 하는 식사를 놀이나 문화로 여기는 사람들을 말하는 건 아니다. 자기가 수저를 뜨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 그들의 구부정한 등과 찡그린 콧잔등을 보며 나는 이유 모르게 슬퍼지고는 했다. 이런 슬픔은 여기 이 도시에서만 자생하는 듯했고, 그 감정에 휩싸일 땐 나도 혼자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처량해질 이유랄까 자격이랄까, 하여간 내게는 그런 게 없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더 씩씩하게 밥을 먹었다. 넥타이조차 느슨하게 풀지 못한 사람들, 눈 둘 곳이 없어 휴대전화 화면만 쓸어넘기는 사람들, 옷이 땀에 절은 사람들, 입에 밥풀이나 반찬이 묻은 사람들, 목소리는 크지만 존댓말로 통화하는 사람들, 괜히 점원에게 시덥잖은 말을 거는 사람들, 탁자에 흘린 국물을 깨끗하게 닦는 사람들, 앉았다 싶었는데 벌써 그릇을 비우고 사라진 사람들을 나는 기억한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슬퍼 보이는 건 식사란 누군가와 함께 하는 행위라는 전제가 내 안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함께 먹는 밥은 불편할 수는 있어도 가슴 아프지는 않다. 이것이 이별이나 죽음을 앞둔 누군가와의 마지막 식사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이런 인간과 겸상해야 하는 처지라니 참으로 한심하다 생각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한 식탁 위에서 음식을 공유하는 일은 대체로 유익하다. 식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데 유용한 사회적 행위다. 언젠가 밥 한 번 먹자는 말이 지키지 않을 인사치례라 해도, 그 말을 들으면 우리의 관계가 실오라기만큼이나마 연결되어 있다는 안심이 든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혼자 먹게 되는 이에게 그런 여지가 있을까? 나는 사람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픈 숙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혼자 먹는 밥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어릴 때도 텅 빈 집에서 혼자 밥을 먹어야 했던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게 슬프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어쩌면 그 감정을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직접 라면과 달걀 프라이를 연마할 수 있는 알찬 시간이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프라이팬을 흔들어 달걀을 뒤집겠답시고 가스레인지 주변을 기름 범벅으로 만들곤 했지만, 더군다나 내가 만든 맛에 스스로 만족하는 데 정말 오랜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그 훈련 덕에 더 복잡한 진짜 요리에 도전하는 게 그리 두렵지 않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라면과 달걀 프라이에 사족을 못 쓴다.


첫 직장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비가 아니라 4대 보험에 소득세까지 꼬박꼬박 제한 월급이 들어온다는 게 뿌듯하긴 했지만,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앉은 모두가 소진되고 있다는 등가감정도 함께 느껴야 했다. 사람 탓도 아니고 회사 탓도 아닌 그냥 인간이 월급의 동물이 되어가는 자연스러운 통과의례였겠으나 실제로 매일 닭장 같은 사무실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매시간 자기 자리에서 말라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잠시라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올 필요가 있었다. 혼자 점심을 먹으러 다닌 건 그때부터였다. 그게 오후 일과를 버티는 데 도움이 됐다.


그래서 사뿐사뿐 이름난 식당을 순례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혼자 먹는 밥에 쓰는 돈이 너무 아까웠다. 내가 자주 갔던 곳은 콩나물 비빔밥을 삼천 원에 팔던(나중에 삼천오백 원으로 올랐다) 컨테이너 식당이었다. 두 채가 나란히 붙어 있었고, 그중 내 단골은 장년에 접어든 아줌마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네다섯 명 정도 붙어 앉을 수 있는, 거울을 마주보는 기역 자 벽면 테이블과 이인 용 테이블 한두 개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게는 정오부터 오후 한 시까지 혼자 온 사람들로 붐볐다. 어쩌다 당직을 서고 한 시 넘어서 가게 문을 열면 황급하게 끝낸 파티장처럼 테이블 위엔 빈 그릇만 놓여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나와 같은 사원증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한두 명 있긴 했지만 안면이 익었다 싶으면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그가 사라지고 난 후에 들어갔다. 사내 평균 월급을 감안한다면 이곳이 제격일 텐데 다들 어디로 간 걸까. 다른 누군가도 내 얼굴을 보고는 빌딩 뒷골목에서 시간을 때웠던 걸까?



이 컨테이너 식당에선 라면을 팔았다. 하지만 라면과 김밥을 시키면 밥 한 그릇 값을 훌쩍 넘어서 (라면 국물엔 당연히 밥을 말아야 한다) 나는 콩나물 비빔밥을 즐겨 먹었다. 넉넉한 밥, 매일 소진되기에 신선한 채소, 바닥에 고일 정도로 둘러진 참기름과 원하는 만큼 넣는 매콤한 양념장. 무엇보다 맨 위에 올려주는 가장자리 바삭한 달걀 프라이 때문에 나는 콩나물 비빔밥이 제일 좋았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달걀 프라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며 밥을 비비면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들려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소식들, “경기 침체에 금융권이 본격적으로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섰습니다…….” 시커멓게 그을린 가스레인지 위에선 뚝배기가 끓었다. 자동차 소음, 확성기로 증폭된 누군가의 분노에 찬 고함, 커피를 들고 지나가는 회사원들의 웃음소리가 얇은 알루미늄 문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으나 얇고 탄성 있는 막이 이편과 저편 사이를 부드럽게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내가 생계 전선 한복판에 앉아 있음과 동시에 거기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야릇한 편안함을 느꼈다. 구태여 귀에 이어폰을 꽂을 필요가 없었다. 이 취약한 가건물은 세상으로부터의 방음을 제대로 구현해 주었다. 그건 음악도 완벽히 이루어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때로 기분이 좋으면 이런 저렴하고 훌륭한 콩나물 비빔밥을 먹는 내가 바깥 세상에서 그 어떤 점심을 먹은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졌다. 때로 기분이 좋지 않으면 영원히 모선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난파선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계산을 할 즈음엔 대체로 평온했다. 무엇에도 화가 나거나 조급하지 않았고, 무엇에도 슬프지 않았다. 최소한 알루미늄 문을 열고 햇볕 아래 서기 전까지는 마음이 안전했다.



십여 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면, 남은 사십 여 분의 시간은 말 그대로 여분에 지나지 않았다. 산책을 하거나 서점에 가거나, 이제 막 병을 이겨내려는 사람이 몸가짐을 조심하는 시기처럼 식당에서 다져 온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물러터진 뭔가를 잘 익게 해 주는 한 끼의 빛, 소금과 감미료로 잔뜩 채워진 그 인공적인 빛이 나는 화려한 정찬이나 유기농 식단보다도 좋았다. 지금도 내가 식당을 판단하는 기준엔 이 불완전한 경험이 작용한다. 내가 사랑했던 식당들은 어떤 상황 안쪽에서만, 내가 떠밀려 가는 어느 시절의 맥락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무엇이었다. 이제 그 사실을 일깨워준 컨테이너 식당을 다시 찾으려 해도 시절이 바뀌어 버렸다. 나는 종종 그 식당과 비슷한 곳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하릴없이 사무실 근처의 골목을 헤맨다. 그 가격에, 혼자, 밥 한 끼를 후딱 해치울 수 있는 곳을 되찾길 바란다.


내가 가던 컨테이너 식당은 거대한 빌딩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식당이 사라지기 전에 내가 먼저 그 거리를 떠나버렸지만, 어느 날 오랜만에 근처를 지나다가 그곳의 마지막 한 끼를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나는 그만 식욕을 반납하고 말았다. 어쩐지 막역하게 느껴졌고, 한편으론 의지하기도 했던 장소가 없어짐으로써 나의 한 시절도 나란히 땅에 묻힌 기분이었다. 아주머니가 그리 멀지 않은 가게에서 장사를 계속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쪽 주변으로는 그럴 만한 곳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높은 건물이 더 늘어났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간판을 단 크고 화려한 식당들이 푸드 코트를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 나는 컨테이너 식당이 있던 자리를 가늠해 보며 내가 구시대 편에 남겨졌음을 깨닫는다. 많은 이들이 그곳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 거리엔 처음부터 저 거대한 빌딩이 세워져 있었다고, 그렇게 믿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컨테이너 식당의 한 끼 덕분이었다. 내가 그 시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컨테이너 식당의 한 끼 덕분이었다. 그런 끼니를 나는 진실한 한 끼라 부르고 싶다. 아마 허름한 식당을 지키던 아주머니는 당신의 국자가 어떤 이의 삶을 미미하게나마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누구도 그런 걸 알 수는 없다. 그저 내가 추억할 뿐이다.


거대한 중장비가 컨테이너를 옮기거나 무너트리는 장면까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장사가 끝나고, 내가 앉았던 의자가 길가에 잠시 내어져 있었을지만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쿠션이 찢어진 채로 수거 딱지를 붙이고 용역 트럭을 기다리는 밤을 조심스레 되돌아 걷는다. 가스레인지는 재빠르게 중고업자 손에 들려 다른 컨테이너 식당으로 옮겨 갔겠지. 아주머니는 알루미늄 문을 영원히 잠그며 몇 초의 한숨을 내쉬었을까. 실은 이제 좀 쉴 수 있겠다며 미련 없이 돌아섰을까. 아니면 서울 한복판의 한복판에서 한 끼 가격을 삼천오백 원에 팔다니 애시당초 허튼 셈법이었을까. 사람들이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 들은 마지막 뉴스는 무엇이었을까. 거기서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은 이제 어디를 기웃거리고 있을까. 그 황홀한 비빔장의 레시피가 누군가에겐 무사히 전해졌을까. 앞으로 다시는 먹지 못할 밥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몇 번이나 더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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