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반 마리의 위로
진실한 한 끼 Web Edition
외근과 점심 (4)
먹으러 간 건 칼국수였는데 입구에서부터 일단 이것부터 보시라고 활짝 펼쳐진 메뉴가 있었습니다. 점심 메뉴로 닭 반 마리 백숙이 8천 원. ‘점심 메뉴’라는 문구는 ‘타임 세일’이나 ‘마지막 특가’ 같은 효과를 발휘하지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안 사면 손해, 바보야, 바보. 사실 닭 반 마리가 나온다는 그 자체로도 매혹적입니다. 전 보통 닭을 한 마리도 다 못 먹기 때문에 더 반가웠지요.
이미 2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지만 주문이 가능했습니다. 그 시간에도 자리가 반 정도 차 있었고요. 은쟁반 위에 닭 반 마리, 양철 냄비에 파가 동동 뜬 국물. 밥은 물론 고봉밥입니다. “몸보신 하시고 건강하세요.” 현수막에 쓰인 인사말이 아무튼 친절한 누군가의 목소리로 귓가에 재생됩니다. 어느덧 너무 무거워져 질질 끌고 다니고만 싶었던 카메라를 한 번 더 들고 한 상 차림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필요합니다. 특히 누군가를 인터뷰하거나 장소, 전시, 공연 등을 소개할 때는 시각적 자료를 반드시 첨부해야 합니다. 브릭스 매거진은 신한카드와 콘텐츠 제휴를 하고 있는데요, 특히 그쪽으로 넘어가는 기사들은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더 중요합니다. 우선 표제 이미지부터 인상적이어야 바쁜 이용자들의 간택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읽히는 건 그다음입니다. 해당 콘텐츠를 모바일 앱 환경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문단의 길이도 짧게 잘라줘야 합니다. 원문에 있던 감칠맛 나는 뉘앙스, 깨알 같은 디테일은 아쉽지만 덜어내게 되지요. 문단과 문단 사이에 흥미를 유발할 이미지도 계속 들어가 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끝까지 읽습니다.
이건 모바일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그리하여 눈앞에 불거지는 문제는 이겁니다. ‘그래서 그 멋진 이미지들을 어떻게 만들지?’
가장 좋은 건 저희가 취재한 대상이 여러 용도로 미리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받아서 쓰는 겁니다. 건축 사진은 건축 전문 사진가가 찍은 게 제일 멋있습니다. 우리가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봤던 사진과 실제 방 꼬라지 사이의 괴리에 좌절하는 건 아무래도 괘씸한 상황이지만, 그 좁은 방을 그렇게 넓어 보이게 찍은 솜씨에는 갈채를 보내줘야 합니다. “이야, 한 방 먹었어.” 영화에서 이긴 줄 알고 의기양양하던 조연(혹은 라이벌)이 주인공한테 속아 넘어간 걸 깨닫고 쓴웃음을 짓는 것처럼요.
그리고 차선책은, 아니 최후의 수단은 직접 찍는 겁니다. 취재를 나가는 게 즐거운 이유는 사무실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본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취미 사진가에게 찍을 피사체가 생기는 건 즐거운 일이거든요.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시작했지만 회사에서 쓸 사진을 찍을 땐 디지털카메라를 주로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필름카메라로 작업하는 비율을 늘리려 하고 있습니다. 제 책에 들어간 사진도 반 이상은 필름으로 찍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필름은 보정을 별로 할 필요가 없어서 편합니다.
촬영, 그리고 후보정. 취재하며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고 보정을 하면 ‘취미 사진가’와 ‘프로 사진가’의 차이가 너무 극명하게 보입니다. 장비의 차이도 물론 있지요. 하지만 촬영하는 순간의 감각부터 보정 기술까지 버거운 면이 있습니다. 예컨대 신한카드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타사 중에도 저희처럼 인터뷰를 많이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이를 찍은 사진이 끝내줍니다. 프로필 사진으로 받은 게 아니라는 걸 그냥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인물 사진 톤이 거의 비슷하거든요. 뭐, 누가누가 잘 찍나를 겨루는 장은 아니지만, 어쨌든 모니터링을 하고 있으면 딸꾹질이 날 것 같습니다.
을지로에 ‘망우삼림’이라는 현상소가 있습니다. 사진관에서 필름 스캔을 할 때 사용하는 스캐너는 크게 두 종류인데요, 이곳은 두 브랜드 모두 갖추고 있어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고 스캔하는 해상도 옵션도 다양하여 최근 자주 찾고 있습니다. 일단 현상소 내부 분위기가 끝내줍니다. 대만 혹은 홍콩의 80년대랄까, 멈추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서 불룩 튀어나와 있는 작은 정류소 같습니다. 이곳을 꾸린 분도 사진가인데 수집가의 면모도 보입니다. 과장과 간결의 손길을 함께 지니고 계십니다.
커피를 파는 곳도 아닌데 작은 거실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습니다. 옛날에 사진관에서 인화한 사진을 찾으면 자리에 앉아 하나하나 훑어보고, 즐거워하고, 개중 마음에 드는 건 크게 재인화해 달라고 요청하는 그런 시간도 복원한 느낌입니다. 저도 여기에 필름을 맡기고 시간이 남으면 잠시 자리에 앉아 카메라 렌즈도 닦고 짐도 좀 정리하고 기운도 되찾고 내부 사진도 찍습니다. 연료용 가스는 원래 무향인데 누출을 대비해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향을 만들어 입힌 거라고 하지요? 필름 현상액 냄새에도 그런 화학적인 면이 있는데, 물론 가스 냄새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인공적이고 달착지근해요. 정말로 현상소에 와 있구나, 그런 기분이 듭니다.
요즘은 필름 가격이 금값입니다. 안 그래도 절박하던 생산량이 코로나19 때문에 더 줄어들어 불과 3~4년 전보다 4~5배는 비싸졌습니다. 그럼에도 필름을 더 자주 맡기는 것은 어쨌든 취재를 위해 필름으로 찍는 사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고급 필름이 아니면 선명하기는커녕 디테일이 뭉개지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그 특유의 색감이 필름을 계속 찾게 합니다. 콘텐츠에도 여러 장을 모아서 붙여 두면 못 찍은 사진도 잘 찍은 것처럼 보입니다.. 후보정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결국 이건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해 보려는 꼼수이기도 합니다. 필름이라는 매체가 견인하는 그 힘을 저도 좀 빌려 써보려는 겁니다.
잠시 쉬었다 망우삼림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니 허기가 집니다. 걷다가 눈에 띄는 곳에 갈까 싶었지만, 그럴 힘은 없는 것 같아 지도 앱을 켭니다. 충무로 쪽에 식욕을 당기는 식당 이름이 있네요. 그쪽으로 향하며 카메라에 들어 있는 흑백 필름으로 인쇄용지를 나르는 지게차 사진도 찍고 길 한가운데 리어카를 놓고 물건을 파는 아저씨도 찍습니다. 어느덧 도착한 곳이 ‘사랑방 칼국수’. 8천 원짜리 점심 메뉴로 닭 반 마리 백숙을 주는 이곳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닭을 꼼꼼하게 발라먹었고, 다리는 잠깐 아껴두고, 국물에 밥을 말아 먹었습니다. 따로 내어주신 파 접시를 쏟아붓고 말이죠. 닭고기는 육질이 정말 부드러워서 새삼 가격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몸이 반응한 건지 기분이 플라시보 효과를 일으킨 건지 후다닥 사무실로 돌아갈 힘 정도는 얻은 듯했습니다.
사랑방 칼국수를 다녀온 지 한 달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동안 망우삼림은 서너 번 더 갔지만, 백숙 백반을 다시 먹으러 가지는 못했네요. 그 사이 식당을 찍은 흑백 사진까지 현상 되어 나왔고요. 사진을 다시 보니 식당 간판 위에 86년도 영화 「고래사냥2」 포스터가 그려져 있었더군요.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는 “고래사냥2는 확 다릅니다”였습니다. 이 동네에 남은 이런 식당들의 존재는, 그게 당연했던 시대를 훌쩍 지나고 나자 뭔가 ‘확 다른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식당. 지난 시간을 눈앞에 되돌려 놓은 현상소. 둘은 실제로 닮았을까요, 저의 렌즈에만 그렇게 비치는 걸까요.
『진실한 한 끼』를 출간하며 몇몇 챕터의 초고와 웹으로만 발행한 네 편의 원고를 묶어 이번 브런치북을 발행했습니다.
혹시 이 브런치북이 마음에 드셨다면 서점에서 책도 찾아 보세요 :D
「진실한 한 끼: 외근과 점심」은 브릭스 매거진에 계속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