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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침, 열차에서 본 것들

상상, 의심, 그리고 미지의 마을들

by 베르고트

그 아침, 열차에서 본 것들. 색이 바래고 표면은 긁힌 반원형 천장. 내 무릎까지 쳐진 초록색 커튼. 진동에 맞춰 까닥거리는 철재 고리. 새벽녘에 비어버린 침대. 이른 아침, 누구도 몰래 채워진 침대. 이불을 개는 승무원. 느긋하게 아침을 먹는 스님. 간이탁자를 설치하는 아주머니. 뜯긴 채로 버려진 과자 봉지. 아무 일 없이 난간에 누워있는 내 파란색 가방. 얌전하게 나를 기다리는 내 파란색 신발. 간헐적인 밭은기침. 이층 침대에서 내려올 때 몸뚱어리가 출렁이며 느껴지는 아찔함. 피부로 볼 수 있다 해도 무방할 에어컨 바람의 맹렬함. 창문 밖으로 후퇴하는 울창한 산림. 노란 평원. 이름도 모를 어느 작은 역. 그 역이 소속된, 땅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의 터전. 황록색 평원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오두막.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뿔이 난 소. 창밖의 모든 것을 주시하는 아침 햇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리는 열차.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객실에서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는 여행자들. 그들은 땀이 나지 않는 건지 궁금한 나의 표정. 거대한 배낭, 육중한 몸들. 슈퍼맨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와 녀석에게 "슈퍼맨"이라고 농을 던지는 스님. 그가 들고 다니는 아이폰과 캐논 카메라. 이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승무원. 잠에서 깬 D. 에어컨 칸이 추운지 선풍기 칸으로 옮겨 가는 호주 커플. 아직 도착 시각까지 한참 남았다고 선고하는 시계. 유리가 없어 깨끗하게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화장실 창문. 변기 아래로 흘러가는 무명, 무한의 철로. 도대체 이 많은 양을 다 어디다 싣고 가는 건지 궁금할 만큼 콸콸 흘러나오는 수돗물. 내가 손바닥에 일으킨 비누 거품. 푸석푸석한 피부. 서양 여행자들에 비해 참 멋없게 자라는 내 수염에 대한 푸념. 갑자기 떠오른, 어제 사놓고 먹지 않은 KFC 햄버거. 반나절이나 지나 영 맛이 없던 그 햄버거.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덴버로 히치하이킹을 하는 샐의 여정. 그의 것에 비하면 편하고 풍족하기 그지없는 나의 여행.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상상. 내가 한참 남은 여정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의심. 나완 상관없이 스쳐 지나가기 바쁜 미지의 마을들. 드디어 지척까지 다가온 치앙마이. 제대로 닦인 차도. 보다 집다운 형태를 갖춘 주택들. 신호를 받은 주자처럼 짐을 챙기는 승객들. 그리고 뜨거운, 정말 뜨거운 태국 북부의 햇살. 그 한낮, 열차에서 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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