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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석양의 전조

한 달간 여행한 곳 중 어디가 제일 좋았느냐는 물음에

by 베르고트

사라지고 나서야 사라진 것의 가치를 알아본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우리는 자주 말한다. 그럴 때마다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동물은 아닌가 보다. 안갯속에서는 안개의 시작과 끝을 헤아릴 수 없다. 바깥에 서야 운무가 세상을 어떻게 집어삼켰는지 보이는 법이다. 시간도 그와 같다. 지나가고 나서야, 더는 바꿀 수 없는 과거로 굳어버리고 나서야 그 시간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있다. 왜 매번 후회하도록 생겨먹었느냐고 가슴을 치기도 했었다. 지금은 영원히 모르는 것보단 뒤늦게라도 아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중이다. 어쨌든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삶은 살 만한 무엇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을 테니까.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넘겨볼 때마다 유독 치앙마이에서 찍은 컷 앞에 오래 멈추곤 했다. 치앙마이, 그래, 치앙마이에도 갔었지, 그곳이 어떤 곳이었더라. 방콕을 떠나 처음 치앙마이 기차역에 내렸을 때,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열다섯 시간 동안 덜컹거리는 기차에 실려 오며 현실감이 떨어진 탓도 있겠지만, 역사驛舍에서 본 하늘과 땅의 나지막한 경계가 방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었다. 건물은 더 종교적인 색채를 뗬다. 자동차도 그리 많지 않았고 택시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비포장도로에선 흙먼지가 날렸다. 그래서 남부 도시보다 건조한 숨을 쉬었다. 주변엔 온통 나와 같은 외국 여행자뿐이었고 그 수도 적지 않았으나 우리 사이는 어쩐지 듬성듬성해 보였다. 방콕에선 종종 사람이 공간을 지배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치앙마이는 정반대였다. 거대한 사원이든 좁은 골목길이든 이 도시에서 포화상태인 곳은 없었다. 토박이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제 부피만큼의 공간을 잠시 빌려 쓰다 떠나는 방문자에 지나지 않았다. 초연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긍정적인. 차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심심한. 기차에서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치앙마이를 그렇게 보았다.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치앙마이 구시가지의 풍경을 꽤 많이 찍었다. 내가 왜 셔터를 누르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야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찍은 사진들이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충동에 따라 셔터를 누른 순간엔 잘 몰랐던 것들. 지나가고 나서야 사진과 함께 환기된 이 도시의 초상들. 그건 해 질 녘의 치앙마이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치앙마이에선 삼 일을 보냈다. 체류 시간을 정확하게 셈하자면 사십팔 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나와 D의 게스트하우스는 구시가지에 있었다. 방문은 자물쇠로 잠그고, 기둥이며 서까래며 작은 도마뱀 두서 마리 정도는 항상 눈에 띄는 곳이었다. 파티오의 지붕 아래엔 한지 같은 재질로 만든 우산이 매달려 있었는데, 표면에 꼬질꼬질 때가 끼어있어도 퍽 보기 좋은 장식이었다. 그 아래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한낮의 더위를 잊게 하는 바람이 불어왔다. 가끔 어딘가에서 풍경 울리는 소리도 들려올 만큼 주변은 조용했다.



구시가지는 서너 시간 정도면 충분히 돌아보고 남았다. 신시가지라고 할 수 있는 님만해민에 잠깐 다녀오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치앙마이는 곧 구시가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틀이면 뽕을 뽑고도 남는다고, 우리의 주 목적지인 라오스로 짓쳐 달려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여행이 끝난 후, D에게 한 달간 여행한 곳 중 어디가 제일 좋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D의 대답은 의외였다. 치앙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라 여겨졌던 그 대답을 곱씹자 이번엔 고개가 끄덕여졌다. 같은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D와 다를지 몰라도 최소한 가장 아쉬움이 남는 곳을 묻는다면 나 역시 치앙마이라고 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머문 지 하루 만에 우리는 치앙마이를 지루하다 여기기도 했다. 김치나 젓갈처럼 도시도 숙성을 거쳐 진정한 맛을 발휘하는 것일까? 막상 치앙마이에 머물 땐 좋다는 말 한마디 없던 D가 지나고 나서야 그곳을 최고로 꼽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숙소는 구시가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타논 랏차담넌(‘타논’은 태국어로 도로를 뜻하며 ‘소이’보다 넓은 길을 가리킨다)’ 서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동서로 이어진 이 대로에서 해 뜨는 방향으로 쭉 걸어가면 ‘타패 문’이 나오는데, 그 주변이 구시가지에서 가장 번화한 여행자 거리다. 13세기에 치앙마이를 수도로 삼았던 란나 왕국은 버마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도시(구시가지) 외곽에 성벽과 해자를 쳤고, 타패 문은 우리나라의 숭례문이나 장안문 같은 성문 중 하나였다. 워낙 많은 여행 안내서에서 타패 문을 기준으로 구시가지를 설명하기 때문에 우리도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랏차담넌 도로를 따라 직행하진 않고 다른 길을 통해 에둘러 가면서 저녁도 먹고 시가지 구경도 하기로 했다.



짐을 부리고 샤워를 한 다음 오후 세 시가 넘어 방에서 나왔다. 방콕에 비해 딱히 기온이 낮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습기가 적어 산책하기엔 좋았다. 거리도 한산했다. 여행자보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어딜 가도 북적였던 방콕에 견주면 이곳은 시골이나 다름없었다. 이방인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액티비티를 하거나 고산족을 만나기 위해 도시를 벗어난 것일까? 곳곳에 붙은 여행사 광고 사진 속에선 들뜬 표정의 모델들이 짚라인을 타거나 호랑이를 만지며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다. 나는 그다지 활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서구의 주인공들처럼 밀림 속으로 뛰어들거나 며칠에 걸쳐 트레킹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런 포스터를 구경하며 한적한 골목을 헤매는 편이 좋았다.



간간히 이제 막 도착한 듯한 여행자가 눈에 띄기도 했다. 튜빙, 카약킹, 강 낚시, 패러글라이딩, 사이클링, MTB, ATV, 코끼리 밥 주기 등등…. 동남아시아 여행을 액티비티 투어로 치환하는 정열은 그들이 걸머지고 있는 무거운 배낭에서부터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특히 60, 70리터짜리 배낭은 압도적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여행을 하길래, 도대체 무엇을 그리 챙겨 다니길래 저 큰 가방이 꽉 차 있는 것일까 항상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다니길래 저 큰 가방을 초등학생 책가방 메듯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지도. 아마 그 힘으로 줄에 매달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고, 이박 삼일의 트렉킹에 도전하는 것이겠지. 서른을 몇 해 넘기고, 걷는 것 외엔 운동도 일절 않고, 때문에 체력이 고갈될 만큼 고갈된 직장인 입장에선 그들과 나 사이에 유리벽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체력과 관심의 부재만 원인은 아니었다. 방콕을 떠날 때 나를 사로잡은 생각,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바로 그 생각에 단단히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목표는 뚜렷하면 좋다. 단 하루를 놓고도 목표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느끼는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다.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뚜렷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말의 고매한 동의어일 따름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지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집착 때문에 소득도 없이 분주해진다면, 그건 그 나름의 우를 범하는 일이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열차에서 어제 남은 햄버거와 치킨 너겟을 먹은 아침 식사가 오늘 먹은 전부였다. 그때 카페 겸 식당인 ‘미스 코너리’가 구원투수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다. 동그란 간판엔 미국의 ‘풍요한 사회’ 시대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듯한 웨이트리스가 그려져 있었다. 데칼코마니처럼 같은 모습으로 마주 보고 있는 여성은 어설프게 생긴 국자를 들고 있었는데, 그 어설픔도 머리 위에 박힌 코카콜라 활자체의 식당 이름도 내 식욕을 자극했다. 이곳이라면 태국식으로 해석하지 않은 진짜 서양 요리를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소한 소품 하나도 신경 써서 배치하고, 가난한 예술가를 위한 살롱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인테리어가 우리를 맞이했다. 이곳의 주력 메뉴가 파스타라는 사실도 반가웠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D는 피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가 피자를 좋아하는 만큼 나는 파스타를 좋아한다. 파스타는 집밥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매일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음식이다. 메뉴판을 펼치자 소스도 크림, 토마토, 오일 등 구색이 잘 갖춰져 있었다. 나는 닭고기가 들어간 스파이시 소스 파스타를, D는 치즈를 올린 돼지고기 볶음밥을 주문했다. 먼저 나온 건 파스타였다. 스파게티보단 통통하고 우동 면보다는 얇은 면 위에 굴소스를 넣은 올리브유와 후추, 그리고 맵기로 소문난 말린 쥐똥고추(프릭키누)가 듬뿍 얹어져 있었다. 한국에서도 태국 고추를 곧잘 먹었던 나는 입안이 얼얼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D의 볶음밥이 준비되는 육 분여의 시간 동안 한 접시를 싹 비웠다. 태국 역시 면요리가 발달한 덕분인지 면의 삶은 정도로 판가름 나는 식감과 소스의 농도에서 솟아나는 풍미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태국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먹어도 배가 고팠다. 칼칼해서 속이 쓰린 데다가 양도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토마토소스가 들어간 새우 파스타를 한 접시 더 시키고 말았고, 난생처음 앉은자리에서 파스타 두 그릇을 먹을 판이었다. 가격도 접시 당 75~85밧(한화로 약 삼천 원)이라 부담도 덜했다. 한국에서 이 돈으로 먹을 수 있는 면요리라고는 라면뿐 아니겠는가. 나를 보는 D의 눈빛에서 이게 그렇게 맛있는가 하는 의문부호를 보았지만, 머쓱하지 않았다. 볶음밥 한 접시에 파스타 두 접시, 거기에 차가운 커피까지 두 잔을 시키자 식당 주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해졌다.


결국 지키진 못했으나 치앙마이에 있는 한 이곳에 매일 오리라 다짐했던 말을 기억한다. 이후로 이만큼 만족스러운 음식이 없을 줄 알았더라면 한 번이라도 다시 찾았어야 했거늘. 그저 야간열차를 타며 쌓인 피로가 자연스레 풀리면서 이 심심해 보이는 도시에서는 뭐라도 잘 될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을 느꼈다. 식당을 나서자마자 쏘인 햇살이 변화의 상징이었다. 산책을 나설 때만 해도 새파랗게 투명하던 햇살은 그새 오렌지 크림빛으로 무뎌져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몇 번이나 석양을 아름다워했던가. 그중 손에 꼽을 만한 날이 바로 여기, 오늘이라는 사실을 부른 배를 두드리고 차가운 커피를 홀짝이면서 조금은, 조금은 예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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