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첩에 타인의 삶을 채집하고 싶었다
밤이 깊을수록 역 안에 사람이 많아졌다. 치앙마이행 기차의 출발 시각은 더디게 왔다. 문득 기차역 대합실 의자와 티켓 창구 사이에 낮에 들렀을 땐 보지 못했던 임시 구조물이 세워져 있음을 알았다. 보라색 휘장과 꽃장식, 그리고 한 여성의 초상화가 걸린 부스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방콕 시내에서 초상화를 통해 자주 봤던 그 여성은 태국의 둘째 공주인 마하 짜끄리 시린톤 공주였다. 최근 서거한 국왕과 함께 태국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왕족인 그녀의 탄생일이 4월 2일, 당시로 치면 바로 다음 날이었던 것이다. 차뚜착 시장이나 거리의 옷가게에서 유독 보라색 티셔츠가 많이 보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태국은 불교 국가이지만 그보다 먼저 들어온 힌두교에서 유래된 전통이 아직 남아있는데, 그중 하나가 요일별로 상징하는 색깔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는 과정에서 각 요일을 상징하는 부처상도 생겨났다고 한다. 태어난 날짜만큼이나 태어난 요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국인의 정서는 역시 종교에서 비롯된 모양이다.) 시린톤 공주는 토요일에 태어났고, 토요일의 색이 바로 보라색이었다. 때문에 국민들은 공주를 상징하는 보라색의 옷을 입음으로써 그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특히 올해는 공주의 육십 번째 생일, 우리나라로 치면 환갑이었다. 태국에서도 자신의 띠가 다섯 번째 돌아오는 이 해에 큰 의미를 둔다고 하니 전국적으로 들썩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는 나라 중에서도 태국만큼 왕가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이 깊은 나라도 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왕궁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방콕을 떠난다는 사실이 께름칙할 수도 있었다. ‘께름칙할 수도 있었다’는 말은 결국 그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번엔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뚫고 달리던 택시 안으로 돌아간다. 왕궁과 왓 프라깨우(에메랄드 사원)로 향하던 길이었다. 나는 폭우 때문에 방콕 최대의 관광지를 못 볼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기보단 이대로 살아서 내릴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있었다. 택시 운전사가 이 비난리에도 와이퍼를 움직이지 않고 택시를 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 수동으로 한 번씩 움직일 뿐이었다. 이런 만만한 유리가 또 없다며 빗줄기도 달뜬 모양이었다. 빗물 때문에 앞차의 후미등이 손으로 문지른 것처럼 크고 흐릿하게 보였다. 어떻게 차량 간격을 유지하고 로터리도 유유히 돌아내는 건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열대성 소나기에 워낙 익숙해져 이 정도 빗물이야 유리창의 일부처럼 투과해 보는 경지에 오른 것일까?
우리도 덩달아 긴장이 풀렸을 즈음, 예전에 방콕에 와본 적 있는 D가 이 폭우를 뚫고서라도 왕궁과 사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내키지 않았다. 우산이 없어 홀딱 젖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이 빗속에선 일 분도 안 돼 카메라가 아작날 것 같았다. 그리고 실은 의심스럽기도 했다. 지금껏 크기와 웅장함을 자랑하며 어찌 됐든 꼭 가봐야 한다고 추천되는 관광지에서 곧잘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태국에 오 일 정도 머물며 좋든 싫든 당시 푸미폰 국왕의 얼굴에 익숙해졌다. 곳곳에 초상화가 걸려있기도 했지만, 일단 지폐마다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 자연스레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총명해 보였고, 안경 너머로 인자한 눈빛도 읽혔다. 이십일 세기에도 국민의 신망을 받는 국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신선하면서도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부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행자로서 국민과 국왕의 교감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어찌 꼭 왕궁뿐이겠는가.
종교도 그렇다. 95%의 국민이 불교 신자라는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75cm 크기의 옥으로 만든 불상을 봐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왕궁에는 국왕이 살지 않고 에메랄드 사원에는 승려가 거주하지 않는다.) 가장 생생한 증거는 길 가까이에 있었다. 국왕의 생일에는 그를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고, 공주의 생일에는 보라색 옷을 입는다는 것. 헛되이 들어선 골목길 허름한 집 앞에 그만큼이나 오래된 사당이 하나 놓여있는데, 그 위에 초콜릿 바 하나가 시주돼 있는 걸 보는 것. 어떤 점에선 민간 신앙이 아닐까 싶은 종교의 혼재 속에서 수수하고 진솔한 마음 한 줌 엿볼 수 있다는 것. 나는 보다 사소한 방식으로 세상을 체험하고 싶었다. 게다가 랜드마크 하나 정도는 아차 빼놓고 돌아와야 다음에 다시 갈 핑곗거리를 만들 수 있었다. 예컨대 홍콩에 세 번이나 가는 동안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와이 오아후 섬에선 다이아몬드 헤드 정상이 통제돼 와이키키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절경을 놓쳤다. 피렌체에서도 그랬다. 군 복무 중에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세 번이나 읽고 남녀 주인공이 재회하는 두오모 옥상 전망대에는 도대체 어떤 사랑의 환상이 머무는지 궁금해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됐는데, 정작 피렌체에 갔을 땐 시간에 쫓겨 올라가 보지 못했다. 같은 방식으로 방콕에도 아쉬움 하나를 남겨둘 수 있는 것이었다.
대신 택시 아저씨에게 부탁을 드렸다. 비가 너무 와서 처마도 없는 이곳에 내릴 순 없을 것 같으니 그냥 왕궁 주변을 한 바퀴 돌아달라고. 단체 여행에서 흔히 그러듯, 분에 넘치지만 택시로 차창 관광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친절한 아저씨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왕궁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몸을 숙여 올려다봐야 황금탑이 보일 정도로 키가 큰 벽과 지붕의 황갈색 사면을 속기로 감상했다. 그것도 빗줄기에 갈라지고 볼록하게 왜곡된 채로 보았다. 하지만 답답하진 않았다. 그 웅장하며 미려한 건물은 조금도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 즉석에서 택시 아저씨 같은 제삼의 눈을 연마한 게 아닌가 깜빡 믿어버릴 정도로.
방콕을 떠나는 날, 이곳에서 보고 겪었던 일들을 되새기면서 일종의 숙제를 푸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장면들은 떠올리면 흐뭇한 웃음이 나오고 마음을 꿈지럭거리게 했다. 반면 어떤 장면들은 무언가 부족했다는 느낌과 함께 이젠 돌이킬 수 없음을 한탄하게 만들었다. 이 도시의 종착지에서 나는 상반된 순간들을 분류하고 가려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이른바 실패한 순간들의 무게 역시 무시할 순 없었다.
이름부터 『길 위에서』를 연상케 했던 인기 클럽 ‘루트Route 66’에서 보낸 밤은 어떨까. 반대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수쿰윗의 어느 클럽은? 아니면 시암 지역의 거대한 쇼핑몰 안을 헤매고 다녔던 오후의 피로는 또 어떨까. 활기찬 나이트라이프, 흥이 넘치고 매력적인 젊은 여행자, 서구화와 자본화가 매만진 방콕의 화장기 짙은 얼굴들을 만나고자 했던 그 숱한 기도企圖를 말이다.
여행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대하던 환상의 거지반이 실은 단단한 오해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예컨대 RCA 지역에 있는 클럽 ‘루트 66’는 입장료를 내고 입구를 통과할 때만 하더라도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장소였다. 각각 힙합, 일렉트로닉, 라이브 음악이 주제인 세 곳의 홀로 나뉘어 있는 구조가 퍽 마음에 들었다. 카오산 로드에선 구경도 못 했던 근사한 옷차림의 젊은 남녀도 수두룩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성을 해체하는 음악에 젖어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흥이 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여기엔 흥이 없다고 여겨졌다. 비싼 술병을 자신의 표지라도 되는 양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눈을 마주치는 것과 눈치를 보는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서로의 살갗을 끊임없이 붙였다 떼며 유희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표현이 우습지만, 서울 어느 어느 지역에서 인기를 끈다는 고만고만한 클럽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월요일이나 화요일처럼 부적절한 날에 찾아간 한적한 클럽이나 펍 역시 나름의 문제가 있었다. 진작 은퇴하고도 남았을 초로의 서양 남자들이 그들의 딸 뻘 정도로 보이는 태국 여성을 대동해 나타나곤 했다. 개중엔 진짜 연인도 있었겠지만, 친밀함이 없고 상투적인 관계가 대다수였다. 때로는 순전히 사무적으로 나란히 앉아 남자는 술담배를 즐기고 여자는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단지 육체만 공유할 뿐, 서로를 은하 저편에서 온 이방인보다 더 멀게 느끼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뭘까?” 나와 D는 그들을 볼 때마다 짧은 문답을 주고받곤 했다.
“글쎄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모두 이해하기엔 역부족인 탓인지 가끔 철저한 개인주의가 이 도시에 횡행한다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실로 주변의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으니 우리도 그래야 마땅했다. 침묵 속에서 불편한 술잔을 기울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무감각한 순간들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성에 찰 만큼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다는 불만이었다. 또는 그러려 하지도 않았고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수치심의 발로였다. 나는 타인의 삶을 채집하고 싶었다. 여행 노트에 이름 모를 여행자의 사연을 가득 담고 싶었다. 알랭 드 보통이 “나의 수첩은 (…) 여행자들의 영혼의 스냅 사진들로 점점 두꺼워졌다”라고 말했던 일을 나도 해보고 싶었다. 물론 중간 결과는 형편없었다. 우리는 낯을 가리고 용기와 넉살 따윈 없는 여행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망했다. 몇 분 후 오를 야간열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하루라도 더 여행에 길이 들어 눈을 뜨고 나면, 마침내 정오를 맞아 북부 도시의 생경한 플랫폼에 받을 디디고 나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바쁜 마음도 비로소 느긋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다음 날과 다음 도시는 다를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은 채 침을 챙겨 의자에서 일어났다. 당시에도 이성의 한구석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는 이 불충분한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떠하랴. 후알람퐁의 승강장을 가로지르며 나는 두 번째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조금 더 나를 열어보자고, 그것이 첫 번째 실마리가 될 거라고. 그런 내게 이 자리를 통해 벌써 어깃장을 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니, 배낭을 멘 내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유럽 배낭여행 이후로 얼마 만에 야간열차를 타는지 모른다. 침대칸에는 수은색 기둥이 비계처럼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수술복을 연상케 하는 옅은 청록색 커튼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통로가 한 명 겨우 지나다닐 너비라 좁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막상 양옆의 침대는 크기가 넉넉했다. 나는 위 칸을, D는 아래 칸을 쓰기로 했다. 짐을 올리고 시범 삼아 가만히 누워보았다. 베네치아에서 빈으로 이동할 때 탔던 야간열차보다 훨씬 넓고 아늑했다. 이 정도면 호텔이나 다름없다는 극찬이 나올 정도였다. 곧 여행자와 현지인 들이 간식거리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익숙하게 자리를 정돈하고 커튼을 쳤다. 열차 안에 청록색 길이 생겼다. 공간이 닫히자 절로 벽 너머가 궁금해졌고, 얼굴도 모르지만 같은 운명을 나눌 공동체가 생겼다는 사실에 흥분이 됐다. 어쩌면 추워서 떨리는 몸이 기대로 떨고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출발하기 전에 간단히 세수를 한 뒤 자리에 올랐다. 역에서 산 햄버거도 먹고 술도 조금 마실 생각이었지만(열차 안에서는 금연은 물론 금주다),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고 말았다. 꺼슬꺼슬하지만 따뜻한 이불이 좋았고 실내도 그리 건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식이 사라지는 속도에 비해 깊이 잠들지는 못했다. 열차가 너무 흔들려서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비행기를 타고 심한 난기류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하늘을 날 때보다 안전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피로에 찌든 두뇌는 열차가 옆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과장된 상상을 제멋대로 펼쳐나갔다. 오랜만에 맛보는 두려움, 어릴 적 잠들기 전에 갑자기 찾아오곤 하던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이불을 끌어안았다. 약간의 스릴과 약간의 낭만을 안고 열차는 쉼 없이 북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방콕에서 수집한 기쁨도 경외도 미련도 아쉬움도 잠시 잊으라는 듯, 요동치며, 밤을 접고 또 접어 우리를 실어날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