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나는 영원히 아버지이다.
아들이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아빠란 존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아들은 입버릇처럼 나를 압빠라고 불렀다. 아들의 눈빛은 “지금 뭐 해?”라는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서 “네가 만지고 있는 그 버튼 많은 상자를 나도 물고 빨고 만지고 싶어”라는 맹렬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어디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아들을 무릎 위에 앉히자 노트북을 만지려는 아들과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나 사이에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먼저 도전장을 내민 주제에 내 쪽이 피곤해졌다. 심장에 폭발하는 생명력을 지닌 아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결국, 아들을 도로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들은 책상 밑에 쌓아둔 상자를 짚고 일어서서 호기심 어린 눈을 노트북에서 떼지 못했다. 그럴 땐 이름을 불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곧 돌이 되는 아들을 관찰하는 쪽은 나라고 생각했다. 무엇을 궁금해하고, 무엇을 바라며, 원하는 것을 손에 쥐지 못했을 때 어떻게 성질을 부리는지, 노트는 아니더라도 기억 한 구석에 기록해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아들이 장성하면 너는 그때 그랬어, 그 기록을 꺼내 약간의 과장을 보태 놀려주겠다는 중장기 계획도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들도 나를 관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바닥에 붙어서, 아직 80cm에도 미치지 않는 높이에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 등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것은 아들이 평생 기억할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기억될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쓰긴 했으나 당장의 이미지 관리에 급급했을 뿐, 그것이 영속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나는 영원히 아버지이다. 내가 하는 말, 내 얼굴을 덮은 표정, 가족과 가족 아닌 사람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내가 늙어가는 모습을 아이는 기억할 것이다. 내 나이가 되면 아버지는 항상 그런 모습이었어, 한두 문장으로 되새길 것이고, 나는 미루어 짐작할 수도 없는 어떤 감정을 그 순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는 향수가 될 것이다. 나는 한 인간의 세계에 초석이 될 것이고, 그 새로운 세계가 뚜렷해지는 만큼 희미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기억하기 위해 살아왔다면, 이제부터 나는 기억되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
그러자 나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제 장례식에 어떤 꽃이 놓이고, 어떤 음악이 흐르며, 누가 애도사를 읽을지 상상하는 사람처럼 나는 아들에게 기억될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하루 몇 시간씩 글을 쓰는 삶을 이루고 나면, 아들은 자신은 안중에도 없고 작품이니 뭐니 하는 것에만 몰두했던 무정한 인간으로 나를 기억하진 않을까. 그래서 아버지의 인생과 글은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고, 인간을 들여다본다는 사람이 자식 하나 돌보지 않았다고 화를 내지는 않을까.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나는 정말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단다, 매일 후회를 늘어놓는 성가신 노인으로 기억하진 않을까. 아들이 마음이 부드럽고 영혼이 따뜻한 사람이라면 그런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애잔한 아픔을 느낄 것이고, 마음이 곧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꿈을 이루는 데 실패한 삶이 어떠한지 객관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나는 두려울 뿐이다. 가장이 그 모양이라면 아들의 유년기와 청년기도 순탄치는 않을 테니 죄를 짓는 기분까지 덤으로 얹어 새벽처럼 불안해 진다.
나는 아들에게 아직 행동을 따라 하고 싶은 롤 모델, 엄마에게 들어다 주는 이동수단, 먹던 과자를 나눠주며 챙겨주고 싶은 친구(보다는 동생 정도로 여기는 듯하지만), 가끔 손바닥으로 내려치고 손톱으로 꼬집으며 애정을 표현하고 싶은 대상이다. 곧 아들의 기억이 뿌리와 가지를 뻗고, 이성이 새파랗게 날을 갈고, 철없는 시기를 지나 어른으로서 감정을 다스릴 때가 되면, 나는 그에게 진정한 아버지가 될 것이다. 아버지는 곁에 있는 사람이지만 실은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고, 피하고 싶은 날감정의 근원이며, 끝내는 그의 삶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평가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노쇠해진 몸을 끌어안아 줘야 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러기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린 사람이다.
그러고 나면 아들도 아버지가 될 날이 올 것이다. 아들도 언젠가 기억이 되고 현실에서는 희미해질 존재가 되리라는 생각에 나는 아들을 가만히 껴안는다. 가끔 그 헛헛함이 통하면 아들도 내 목에 팔을 두르고 가만히, 위로하고 위로받듯, 그렇게 가만히 숨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