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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Nov 15. 2017

프루스트의 서재에 가다

이 서점에는 고급 디퓨저가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은 일찍 점심을 먹고, 프루스트의 서재에 인사라도 하러 갈까요. 가까우니까 택시를 타지요."


 편집장의 말에 나는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점의 존재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거리상으로도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재주 좋은 택시 아저씨의 운전 솜씨로는 10분. 내가 차를 끌고 간다면 아마 14분. 하지만 주차 공간이 마땅치 않아 보이니 차 댈 곳을 찾느라 10분은 더 소모되겠지. 대중교통으로는 약 40여 분이 걸린다고 했다. 가까운데 애매한, 걸어가도 예상 소요 시간이 크게 다르지 않을 위치였다.


 금호동 작은 서점 ‘프루스트의 서재’는 한 번은 가야지, 가야지 하고는 가지 못했던 곳이다. 업무 시간에 '업무 - 인터뷰?'를 핑계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런 재치는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마 그런 성격이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을 터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금호동은 부동산 사이트를 통해 조금 알고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아이디로만 아는 사이와 비슷하달까. 물론 집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는데, 평균 집값에 엄두도 못 내겠다고 진즉 포기할 만했다. 택시는 아직도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는 신도시 비슷한 풍경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비싼 이름을 단 아파트 단지가 가을볕에 반짝이고 있었고, 상가는 새것이지만 익히 봐 와 진부하게 느껴지는 모습으로 그 주변을 호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살지 못한다고 백안시할 필요는 없었다. 잘 돋은 계절 덕분일까 거리는 퍽 여유롭고 조용해 보였다. 경사가 끝없이 이어지긴 했으나 살아볼 수만 있다면 허벅지 당기도록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약간 의아하기도 했다. 이런 동네에서 어떻게 서점을 운영해 나갈 수 있을까.


 그 답은 미터기 4,900원에서 조금 더 시간을 끌어 꼬박 5,000원을 찍고 멈춘 택시 창문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사이에 낀 주택가 언덕길에 소박한 가게 몇 군데가 자리잡고 있었다. 프루스트의 서재는 그중 한 곳이었다. 어쩐지 사방을 포위한 적의 공세에 있는 힘껏 맞서고 있는 저항군이 떠올랐다. 하지만 급박한 수성守城의 현장을 비유하기에 거리는 지나치게 평온했고, 서점 주인인 박성민 씨는 평상심으로 가게 바닥을 쓸고 있었다. 사진으로 봤던 검은 고양이가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문가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박성민 씨는 사무실에서 만들고 있는 여행 잡지에 기고해 주신 덕에 알게 되었다. 내가 원고 요청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을 여러 번 읽고 (마음대로) 교정하는 과정에서 오래전에 잠깐 인사라도 나눈 사이 같은 친근함을 느꼈다. 문을 열자마자 기회를 노리던 고양이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덕분에 멋진 인사말 대신 "쟤 저렇게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나요?"라는 어줍은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방금 고양이 실종 사건의 빌미를 제공했을지 모른다는 죄인의 심정이 담겨 있었다. 돌아다닐 때마다 공간이 지워진다고 착각할 만큼 새까만 고양이는 이십여 분 후에 책방으로 돌아왔고, 우리가 서점을 나올 때 두 번째 산책을 나섰다. 그것이 그 아이의 일이었다. 책 위에 웅크리는 것도 포함해서.


 우리의 정체를 밝히자 박성민 씨는 반갑게 일어나 생강차를 대접해 주셨다. 주로 자전거 여행을 즐긴다는 그의 말에 언젠가 그날들의 일부를 연재해 달라고 답을 드렸다. 그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꽤 집요한 면이 있어서 머지않아 이메일로 '원고 요청서'를 보내게 되리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읽었던 동네 서점에 관한 그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고쳐 쓰자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힘이 있었다. 누구로부터 비롯됐는지는 모를, 어쩌면 스스로 생겨났을지 모를 욱신거림 같은 것이 전해졌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그런 이야기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갑자기 서점을 꽉 채운 세 남자 모두 초면에 대화를 재미있게 끌어가는 타입은 아니었다. 안부, 몇 가지 사소한 질의응답, 그리고 서로의 계획 - 현재 프루스트의 서재는 월요일 휴무로 운영되고 있는데, 내년부터는 일요일에도 쉴까 고민하신다 들었다. 이미 이 자리에 적어버렸으므로 휴무일 변경이 대외비가 아니길 바란다. - 이 오가고 이내 각자의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생강차를 다 마셔버리면 바로 나가야 할 것만 같아서 한두 모금 정도 아껴두었다.


 우리는 책을 살펴보았다. 집으로 치자면 거실이라 할 수 있는 제일 큰 공간은 소규모 출판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큰 서점에선 볼 수 없는 책들은 하나 같이 개성적이었다. 저자들의 평균 연령은 마흔을 넘지 않을 것 같았고, 어쩌면 서른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 생각, 경험, 취향이 담긴 저작물을 아낀다는 인상이 표지에서, 빠르게 넘긴 책장 안에서 엿보였다. 하긴 뭔가를 쓰고 찍고 그리는 사람치고 그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무엇보다 젊음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이를 일정 기준으로 나누고 구간마다 라벨을 붙였는데 하필 거기에 젊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라는 식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를 시도하는 의지, 하나를 만들고 나서 곧장 다른 하나로 옮겨갈 수 있는 기민함, 끝없는 모색에도 지치지 않는 지구력 같은 미덕들에서 느껴지는 힘이었다. 이 서재에는 고급 디퓨저가 필요하지 않았다. 실내에 가득한 기운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진한 향기나 다름없었다. 나는 저자인지 책인지 이 공간인지 불확실한 대상을 향해 부러움을 느꼈다.


 때로는 저자의 자의식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부끄러움을 느끼며 책을 내려놓기도 했고, 때로는 그냥 예쁜 일기였으며, 때로는 어떤 사람인지 자못 궁금해지는 그런 책을 집기도 했다. 계간 문예지 『자정작용』, 『이면의 이면』, 『52번의 아침』, 『지금은 없는 동네 - 옥수동 트러스트』, 『밤 일기』 등의 제목이 기억에 남는다.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어보고 싶은 책이 많았다. 거기서 꼭 읽고 싶은 책을 찾으려면 한두 시간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사실 프루스트의 서재에 매료된 가장 큰 이유는 이름에 있다.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책방 주인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사람이리라 생각했다. (박성민 씨가 낸 책의 제목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지막 편의 제목과 같다. 그리고 여기 브런치에서 내가 쓰는 필명은 그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 캐릭터다. 나는 내 멋대로 우리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여겼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 길고 긴 소설을 한 권이라도 읽어본다면, 분명 한 번은 그 소설 같은 글을 쓰고 싶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읽은 사람에게는 어떤 공통의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단순히 작은 서점, 동네 책방에서 느껴지는 야무지면서 감상적이고, 동시에 나름의 사연이 있을 법한 신비로운 분위기에 홀린 것은 아니다. 접점이 있는 사람이 만든 공간이기에 나는 이 서점, 서재가 편안했다. 스피커에서는 인디 위주의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남서쪽으로 난 큰 창으로 정오를 지난 햇살이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새 책이 더 많아 시큰달큰한 책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어딜 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책등과 책면이 내가 중요한 가치로 에워싸졌다는 안정감을 전해주었다. 그건 신식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서점이 변화로부터 책을 지키고, 책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러나 책을 둘러보는 시간이 길어지며 어쩐지 슬퍼지기도 했다. 여기 이 수많은 책, 어떤 것은 대형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나왔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퍽 인정을 받고 있으며, 남은 대부분은 창작의 결과물이라는 가치 하나만 조용히 빛내다 결국 발견되지 않은 채 잊힐 운명이었다. 손에 쥘 수 있는 책을 낸다는 것은 작가에게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만들어지는 것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작가의 목표는 자기만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히 저자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책들에 가슴이 아팠다. 나도 그런 이유로 글을 쓰고 있기에 우리에게 예정된 운명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예컨대 이 서재에 이름을 빌려준 프루스트는 그런 이유로 그 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을 넣고 뺄 때마다 부끄러움과 한계, 그리고 동병상련의 위안이 손끝에 묻어났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누구한테 인정받으려고 쓰는 글이 아닌데, 그 글을 담은 책이 나오는 데는 어떤 시험을 거치거나 자격을 얻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게 맞는지. 독립 출판물은 언제나 보기 좋아요. 힘이 되죠. 그런데 그걸 다 읽고 나서도 좋았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실 책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겠지요. 대형 서점에 가면 집어 들고 싶지도 않은 양산형 책들이 쌓이고 쌓였으니까. 결국, 어떤 글이 담겨있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어요?"


 서점을 나와 돌아갈 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언덕을 내려가며 편집장과 나눈 대화는 그렇게 한 사람이 하는 말처럼 두서없이, 불명확하게, 그러나 서로 다르지는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언덕이 있는 동네에서 사는 이야기도 하다가 마을버스에 올랐다. 다섯 명에 불과한 승객을 싣고 버스는 가파른 경사와 좁은 골목을 자신 있게 빠져나갔다. 기사 아저씨한텐 확신이 있었고, 나는 그 점이 부러웠다.


 "어디 외국에라도 다녀온 기분이네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프루스트의 서재는 금호동이란 동네를, 내가 끝내 이주하지 못할 동네를 더 좋아하게 만들었지만, 사실은 금호동 안에서도 동떨어진 공간 같았다. 내 가방 안에는 서점에서 사 온 책 몇 권이 들어 있었다. 그중엔 박성민 씨에게 선물로 받은 그의 저서 『되찾은 : 시간』도 들어 있었다. 책방 스탬프는 찍었는데, 아차, 사인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 다시 가서 책을 내밀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사무실로 돌아와 수여 장을 읽으니 여전히 그의 글은 좋았다. 나는 무엇을 쓸 수 있고 무엇을 써야 하는가, 어쩐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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