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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Dec 31. 2017

살아진다. 살아낸다. 살아간다.

라이프스타일, 예술, 그리고 치앙마이 반캉왓

 몸에 힘은 빼고 마음에 힘을 주고 살자고 하지만 그게 잘 되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몇 개의 첫 문장을 썼다. 전부 지워지거나 마지막 문장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첫 문장을 첫 문장답게 했던 빛깔이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가 너무 많은 힘을 주고 있다고,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종이를 만지는 것처럼 두 눈에 읽히는 글이 우둘투둘한 촉감일 거라고 낙담했다. 나는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려버렸다. 어떻게 이야기를 진행해야 할까 뜸을 들이는 이 침묵이 부끄러웠다.


 아마 당신은 글쓰기에서 뿐만 아니라 나의 삶 또한 이와 비슷하게 흘러왔으리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맞았다. 나는 이런저런 방향으로 첫 발자국만 떼다가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 제자리라고 얕보이기 싫어서 주머니 안에는 핑계만 가득했다. 솔직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지금도 잘 모른다. 나는 글을 쓰며 산다고 둘러댔으나 그것 말고는 어떤 가치를 추구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내 글도 어떤 가치를 추구한 적이 없었다. 지금껏 내가 목격하거나 내게 벌어진 현상을 해석하고 그것을 감당하는 수단으로써 글을 썼을 뿐이다. 이제 알맹이 없는 시간이 더는 배겨낼 수 없을 만큼 길어졌다. 내 마음은 텅 빈 내 안에 무엇이라도 부어 넣어야 한다며 다급해졌다.



 그래선지 요즘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말이 솔깃하다. 라이프스타일이 있다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 어떻게 살지 결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강단이 있고 확신이 있고, 흔들릴지언정 단념은 모르는 인물이 그려진다. 삶의 방식을 몇 가지로 추려서 한 단어로 뭉뚱그리는 용례도 마음에 든다. 그러면 들꽃 같은 인생도 꽃집에서 쥐여 준 꽃다발이 되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가 원래 어떤 식으로든 살고 있었는데 그것을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표현할 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사람은 거시적이면서도 단순한 목표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닫고 허둥대는 것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라이프스타일이란 것이 대체로 소비함으로써, 아니면 소비하지 않으려고 소비함으로써 완성된다는 경향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둠에 던져진 사람에게는 손에 잡히는 게 손전등이든 반딧불이든 중요하지 않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는데 자신의 속도로 거꾸로 걷는 사람들이 그렇게 눈에 띄었다. 그들은 대체로 한 곳에 몰려 살았다. 자신과 비슷한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들과 동행할 때 더 멀리 갈 수 있음을 아는 것 같았다. 나의 가깝고 먼 여행은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망원동과 한남동을 기웃거렸다. 회사가 있는 성수동 골목을 다니며 누구도 모르는 참견을 하기도 했다.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와 포틀랜드와 치앙마이에 갔고, 그곳에 넘실거리는 공기의 압력과 분위기를 노트에 받아 적었다. 먼 캠퍼스까지 쫓아가 강의를 듣는 수강생처럼 여행한테 만큼은 성의를 보였다. 그리고 어찌 먹고사나 걱정스러운 일을 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다른 건 몰라도 공간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곳을 특정한 취향으로 꾸며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맑은 감각을 타고난 사람들, 사람과 가까이 지내진 않아도 내심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지켜보며 어떻게 그들을 흉내 낼 수 있을지를 배웠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들처럼 되기 위하여 해야만 하는 선택을 추려냈다. 기쁘기보다 되레 슬퍼진 것은 이 수업이 재수강이라는 사실, 나는 이미 그 선택들과 낯설지 않으며 몇 번 코앞에 두고 외면했다는 사실 탓이었다.





 치앙마이의 왓우몽은 동굴 안에 불상이 모셔진 사원이다. 경내를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닭들은 날 때부터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태평했다. 일생을 이 사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내가 가본 곳보다 훨씬 더 먼 곳에 다녀왔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황망한 기분이 들어 사원을 빠져나왔다. 왓우몽을 출발해 걸어서 이십 분, 아니 더위 때문에 쉬어야 하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삼사 십 분 정도를 가면 반캉왓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다른 도시의 예술 공동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형성됐다. 월세가 저렴하고, 비슷한 성향의 입주민들이 모이고, 입소문을 통해 사람들이 찾아오고, 공동 프로젝트를 기획해 수익이 아니라 의미를 창출하면서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작지만 좋은 말이 그것의 주인을 가꾸는 법. 반캉왓에 붙은 예술인 마을이라는 별명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수고도 예술의 일부처럼 만들어 준다.



 입구로 몸을 들이밀자마자 마음속에서 풍경風磬이 울렸다. 녹이 슨 철과 세월이 갉아먹은 나무와 작은 구멍으로 자신이 덮었던 과거를 고백하는 페인트 벽이 길을 내고 있었다. 무심하고 단단하게 자란 식물들은 그늘을 만들다 지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작은 공방이나 가게 안에 숨은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마을 앞을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도 문 하나를 넘지 못했다. 왜 아무도 풍경을 달지 않았을까. 바람이 흔드는 종소리가 그치면 이 고요가 더 깊어질 텐데. 일상의 일부를 문밖에 내어놓고 남은 공간을 무언가를 긁거나 자르거나 깎는 소리로 채우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누군가에게 아직 죽지 않았다는 청각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면, 이 정도의 소리가 적당하지 않을까? 내게 허락해야 할 삶의 데시벨은 어느 만큼일까?


 나는 소리의 무게를 연습하고자 품에 안고 있던 아들에게 속삭였다. 여기는 엽서를 만드는 곳이야. 저 액자도 이곳 사람들이 틀을 짰고. 나무는 아무렇게나 자라 있구나. 내가 줄 수 있는 환경이 이렇게 고온다습하다면 너도 큰 힘 들이지 않고 어른이 될 수 있을 텐데. 저기 커다란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은 디자인을 하고 있나 봐. 저 초상화의 주인공은 돌아가신 이 나라의 왕이고, 이 나라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일 년 넘게 슬퍼했단다. 여기서 공방을 차리고 헌책을 팔고 주스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충성하는 성향의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 아마도 저 마음은 사랑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어. 우리에게도 그런 북극성 같은 존재가 있다면 좋겠지. 그러나 행운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단다. 나는 행운이 결국은 온다는 식의 마지막 말이 아들에게 한 거짓말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리고 벽의 두 면이 없는 필로티 같은 헌책방에 앉아 음료수를 주문했다.


 반캉왓 한복판에는 원형 무대 같은 뜰이 있고, 놀러 온 사람들이나 옷과 잡화를 파는 주인들이 피크닉이라도 하듯 둘러앉아 있었다. 비가 오지 않고 그늘만 있다면 일 년 내내 야외 활동이 보장된 태국의 기후가 이들에게 주어진 진짜 행운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도 이런 나라에서 나고 자랐다면, 아니면 뒤늦게라도 오래 살기로 결정했다면, 일조량이 무관하고 항상 어지럽기만 한 내 방이나 사무실에서 글을 쓰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러면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충실하고, 때때로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몰랐던 손재주를 발견하고, 명성이나 결과물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을 가까이하는 시간을 늘리고, 먹고사는 일이 조금은 덜 부담스럽고, 라이프스타일이란 것이 매 순간에 충실하다 보면 자연스레 체화되는 어떤 태도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만약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몰라서 매일 주스를 마시겠다고 결정한 사람이 있다면, 나나 그 사람이나 비슷한 부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글을 쓴다고 어깨에 힘을 줬으니 말이다. 게다가 글을 쓴다는 말에 어린 환상을 등에 업었다는 점에서 나는 비겁하기까지 했다. 어느새 일 년 내내 야외 활동이 보장된 땅에서 살았다면 취했을 태도도 수정하고 있었다. 최소한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일은 없을 테니 삶의 모든 부스럼을 포기했을 것이고, 숱한 첫 문장을 마지막까지 무사히 이송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을 거라고. 그런데 나는 이런 곳에 살고 있지 않으므로 그럴 수 없다고. 이런저런 방향으로 첫 발자국만 찍다가 어디로도 가지 못한 삶, 지평선 너머로 걸어가 본 적 없는 삶이 타인의 인생을 훔쳐본다고 달라질 리가 없었다. 아내와 아들은 패션프루츠가 들어간 주스를 달게 마셨다. 어떻게 살지 몰라서 쓰는 글들은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이 주스 한 잔만큼의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살아진다. 살아낸다. 살아간다. 피동형인 살아진다와 능동형인 살아간다의 사이에 살아낸다가 있고, 그 말은 꼭 버팀형처럼 보인다. 나는 되는 대로 살지도, 하는 대로 살지도 못하는 그 단계에 있다. 그렇다고 다른 단계로 옮겨 가고자 안간힘을 쓰려는 것도 아니다. 가족을 위해, 언젠가 쓸지도 모를 작품을 위해 얼마든지 살아낼 자신이 있다. 그러나 꼭 알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면 그렇게 버텨내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지금 내 삶을 살아내는 주어가 도대체 누구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여러분에게 복을 빌며, 새해에는 나도 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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