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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Feb 15. 2018

여름의 섬

카프리 섬에선 벽에 하얀 페인트를 칠해야 한다

 카프리섬에선 벽에 하얀 페인트를 칠해야 한다. 지중해를 달구다 여기까지 밀려온 여름 햇살과 정말로 잘 어울리니까.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때가 탈수록 더 그렇다. 해풍을 맞아 바다빛이 돌거나 햇볕에 익어 크림색이 된 벽들, 지붕들, 반세기 전에 단 것 같은 간판들. 여기선 흰색도 탈색이 된다. 그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온 섬이 여름에 투항해버렸고, 흔들리는 백기는 지금껏 아무도 본 적 없는 색이다.


 얼마만큼 서 있으면 나도 저렇게 바랠지 가늠해 본다. 등 뒤에는 짠 기 도는 흰 비스킷, 지평선 위로는 한 입 베어 문 자두색이 천천히 번져나간다. 그 속도를 측정하는 데 정신이 팔린 사이 뭍으로 가는 마지막 배는 떠나버렸다.


 자기 집 발코니에 서서 지는 해를 보고 언덕에 걸터앉아 해수욕하는 여행자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섬사람들에겐 뭍사람과 전혀 다른 하루가 주어질 것이다. 그들은 항상 어디론가 흘러가는 여행자처럼 보인다. 움직이는 섬, 움직이는 파도, 움직이는 마음. 그러나 오래 떠돌아서 제자리. 나는 발코니에 앉은 한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난간 너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 속엔 섬의 이야기가 심겨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맺힌 어떤 작은 이야기가. 





 그녀는 오후 네 시 반이 되면 발코니에 자리를 잡는다. 여름의 끄트머리, 마지막 휴가를 온 타지인들이 항구와 상점을 오가며 북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항구 변두리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젊은 녀석 하나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들뻘인 녀석은 그녀를 볼 때마다 모자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는데, 정작 모자를 쓰는 날이 별로 없어 매번 그런 시늉만 하곤 했다. 그녀는 정말 손에 모자가 들려 있는 듯한 그의 인사법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 뭍으로 나간 아들 생각이 나서일 것이다. 아니면 그녀가 그의 나이였을 때, 동네 청년 몇이 어디서 흘러들어온 외국 영화를 보고 신사 흉내를 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였을 수도 있다. 청년은 발밑에서 고향을 떠난 친구 안부를 물어왔다. 그녀는 보름 전에 있었던 아들과의 통화를 떠올리며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답했다.


 해변에서 즐거움에 가득 찬 비명이 들렸다. 부유하지만 해가 별로 뜨지 않는 도시에서 온 키 큰 남자 하나가 일행인 여자 하나를 바닷물에 빠트렸다. 친구들은 손뼉을 치며 웃었고, 물을 뱉어낸 여자는 흥분과 수치심에 벌게진 얼굴로 남자에게 뭔가를 외쳐댔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해가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한결 평온해진 그녀는 해변에 꽉 찬 사람들이 마치 자기 집 안뜰에 찾아온 손님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배낭이나 캐리어를 발밑에 놔두고 배가 떠날 시간을 기다리는 이들도 보였다. 그녀의 만찬에 만족하고 돌아가는 지난 밤 손님들이었다. 그 사이 침대 시트는 반듯하게 정돈됐고, 식탁보는 뒤집어 깔려 새것처럼 보였다. 오늘 밤엔 또 오늘 밤의 손님을 맞을 준비를 섬은 마쳤다. 그녀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 끊임없이 드나들 뭍사람들 덕분에 섬이 비지 않으리란 사실이 반가웠다. 아들이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킨다면 그녀가 오후 네 시 반의 발코니에서 홀로 앉아 있을 일도 없을 것이다.


 난간 밖으로 흔들거리는 그녀의 다리 밑에서 아이가 울었다.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동양인 엄마는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아이를 혼내고 있었다. 아이는 한 손으로 엄마의 바지를 붙잡고 혹여나 사라질까 놓지 않았다. 오늘 밤도 섬은 시끌시끌할 모양이었다. 땅을 짚었던 손을 떼자 얇게 떨어져 나온 페인트 조각이 붙어있었다. 섬은 태양 아래 천천히 늙어가고 있었다. 아들이 돌아오면 페인트를 새로 칠하면 어떨까 그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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