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 상자를 뜯으며
우리 집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이케아 가구 상자가 둘 있다. 둘 다 서랍장이다. 하나는 베란다에 놓을 예정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의 작업실 용이다. 조립 난이도는 ‘쉬움’ 정도. 혼자서 옷장도 만들어 세웠는데 만들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그저 나는 미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핑계는 많다. 주말 낮에 만들어야 하는데 주말마다 외출할 일이 생겼다, 이런저런 급한 일 때문에 까먹었다, 너무 쉬우니까 의욕이 안 생긴다, 사실 만들려면 언제든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그거다. 언제든 만들 수 있는데 그때가 지금은 아니라는 거다. 아내도 당장 쓸 서랍장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인지 아니면 사 두고는 잊어버렸는지 채근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서랍장 패키지를 집안 풍경과 완벽하게 동화시켜 버렸다. 언제나 눈에 띄는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상자는 신발장의 일부처럼, 베란다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났다.
비슷한 원리에서 원고는 마감일이 임박해서야 써진다. 내 인생에 그렇게 중요한 원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는 그렇다. (그런데 정작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원고는 중요하니까 마감을 넘겨서 완성한다.) 샤워는 새벽 한두 시까지 미루다 하기 일쑤고, 쓰레기차가 옆 골목에서 캔 찌그러트리는 소리를 낼 때야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을 때도 자주 있다. ‘연료 부족’이 뜨고 나서 주유소를 찾는다. 빨래를 몰아서 한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가 개봉해도 어느샌가 올레 TV에 출시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가격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넷플릭스가 선수를 치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심지어 책조차도 매일 조금씩 읽다가 시간을 너무 끌었다고 생각되면 한 번에 몰아서 읽는다. 나는 많은 일을 그렇게 미적미적 처리한다. 걸음은 같이 걷는 사람이 숨이 찰 만큼 급하면서도.
세상엔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비슷한 상황에 죄책감 느끼지 말라는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다. 게을러도 괜찮다고, 귀찮은 건 당연하다고, 그러니까 이건 쉬는 거라고, 남의 말에 신경 끄라고, 세상의 속도에 맞춰 가지 말라고. 제목만으로도 희망과 위안을 얻는 바람에 정작 그 책들을 사서 읽지는 않지만, 때로 나는 표지나마 쓰다듬으며 저자의 진심을 손끝으로 느껴 보기도 한다. 표지가 그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책의 표지는 거의 비슷한 종이를 쓴다. 다른 급진적인 용지를 결정하는 데 또 엄청난 시간이 걸릴 걸 알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도 정상이라고, 괜찮다고 다독여 주는 책도 본 것 같다. 나처럼 확신 없고, 의심 많고, 실행이 더딘 사람들을 위해 작은 콘서트를 연다면 크게 성공할 것이다. 물론 다들 참석 여부를 결정하는 데 미적거리다가 아무도 오지 못할 수도 있다.
‘미적미적’이라는 말은 좋게 봐 주려 해도 어떤 생명체의 의지 없는 움직임을 떠올리게 한다. 사전은 꾸물거리다와 망설이다, 두 동사로 이 단어를 설명한다. 서점 진열대의 지원군이 고군분투한다 해도 요즘 세상이 반기는 태도는 아니다. 특히 옆에 있는 사람 복장을 터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행위적 흉기를 소지한 셈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나도 결정과 동시에 움직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항상 일이 커지거나 골치 아파지거나 손해를 보거나 어쨌든 그게 실수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온다. 나는 생각이 없는가? 그럴 것이다. 제대로 생각을 했다면 그런 일을 그렇게 쉽게 저지르지 않았을 테니까. 충동구매를 한다든가,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날을 앞두고 술을 마신다든가, 오·탈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인쇄를 넘기거나 SNS의 발행 버튼을 눌러버린다든가, 곁에 있는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실망하게 할 말을 내뱉는다든가…….
확신과 의심 경계에서 나는 대체로 오답을 체크해 왔다. 이렇게 서툴러서야 어떻게 지금껏 멀쩡하게 살아왔는지 놀라울 뿐이다. 나를 설명할 의태어가 하나 더 있다면 그건 꾸역꾸역이다. 미적미적이나 꾸역꾸역이나, 그게 그거지.
현명해지기가 어렵다. 적당한 숙고를 거쳐 최선의 선택을 확실하게 밀어붙이는 이들은 나를 지나 저만치 앞서간다. 추수철 콤바인 같은 그들의 행보는 나에게 항상 미스터리다. 망설이지 않는 것, 꾸물거리지 않는 것, 몇 수 앞을 내다보며 권태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 누군가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라지만, 그 위로가 무의미하다는 진실을 안다. 나는 자신이 없다.
물론 버젓이 살아가는 일에 좀, 꽤, 퍽 서툴다는 게 이케아 상자를 외면할 핑계는 되지 않는다. 나는 마음을 다잡아 보기로 한다. 찰나 같은 봄날, 오전부터 나의 글, 남의 글을 수천 자씩 읽고 점심은 무엇으로 때울까 고민하는 순간에 오늘은 이케아 상자를 뜯자고 결심한다. 언어도 필요 없는 설명서가 있고, 부품은 알아서 준비되어 있으며, 아이 방에 판때기와 나사 쪼가리를 늘어놓는 순간 중간에 멈출 수도 없다. 저 상자는 확신에 찬 삶의 1:10,000 실측 모형이다. 나는 내가 살지 못할 아파트의 모델 하우스에 들어가거나 내가 오르지 못할 엘 캐피탄 암벽 위를 가상현실 기계로써 체험하는 기분으로 그 자체로 가구가 되어 버린 상자를 풀어헤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진짜 가구를 끄집어낼 것이다. 그러니까 저녁을 먹고 나서 잠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아이 기저귀가 떨어져 마트에 가지 않아도 된다면. 설마 좋은 글감이 떠올라 뭐라도 쓰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지만 않는다면…….
찰나 같은 봄날의 저녁, 나는 미적거리는 데도 좋은 점은 있다고 고쳐 생각한다. 나는 어떤 과정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결과를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다. 설거지를 몰아서 하면 동시에 밀린 시트콤 한 편을 감상할 수 있다. 책은 마지막 오십, 길면 백 페이지 정도를 한 번에 읽어야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기름을 너무 많이 채우고 다니면 연비가 떨어진다. 빨래가 너무 많아 셀프 빨래방에 가면 평소라면 만날 일 없는 인물들도 만날 수 있다. 한 남자는 나에게 치약을 팔려고 했고, 어떤 한 남자는 대한민국에서 착하게 살면 손해를 본다는 연설을 건조기가 돌아가는 삼십 여 분 동안 늘어놓았다. 졸려서 쓰러질 것 같을 때 샤워를 하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몇 자라도 더 쓸 시간을 벌 수 있다. 맥주까지 곁들이면 미적미적대는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케아 상자는 오늘도 가구로 남는다.
표제어를 ‘미적미적’으로 정한 순간부터 이 글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분위기가 바뀌는 구성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사람에 따라선 그 반대로 쓰기도 하겠다.) 하지만 아내의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탁에 미적거리는 덴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핑계는 핑계가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엔 아이 방에 달려고 사 온 이케아 선반도 있다. 저녁에 시멘트벽을 뚫을 순 없다는 이유로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가구라고 하기도 뭣한 하얗고 단단한 섬유판이 둘이나 있다. 아이의 책을 올려둘 건데 아이가 잡고 매달리지 않을 위치에 놓아야 하는지 언제든 책을 꺼내볼 수 있는 위치에 놓아야 하는지 나는 고민이 된다. 아무튼 아이는 내가 전동 드릴을 꺼내 자기 방에 구멍 뚫는 걸 지켜보는 순간을 가장 좋아할 것이다. 아내와 아이에게 필요한 건 내가 망설임 없이 벽에 힘을 쏟는 바로 그 태도일 것이다.